북한 열병식은 줄줄이 등장하는 최신형 무기 체계와 더불어 대규모 군중의 일사불란한 움직임 때문에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북한이 8일로 예고한 인민군 창건 기념 열병식에서도 과장된 발걸음의 군인들이 주석단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쳐들면 주민들은 빨강 노랑 꽃술로 ‘김정은’ ‘결사옹위’ 등의 문구를 단숨에 만들어 낼 것이다. 오랜 기간 반복된 연습과 엄격한 통제는 그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쇼’를 완성해 왔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든다. 최정예 인원으로 구성한 군 행렬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수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자로 잰 듯 반듯반듯하게 대형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최근 수년간 외신을 통해 전해진 북한 내 각종 군중 집회 사진 속에 그 비밀이 숨어 있다.
#광장을 뒤덮은 숫자와 기호,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북한의 대표적 군중 집회 장소인 평양 김일성광장 바닥엔 다양한 숫자와 기호가 깨알같이 적혀 있다. 빨강 파랑 또는 흰색 페인트로 쓴 크고 작은 숫자와 무수한 점들, 정체 모를 ‘T’자까지 하나같이 낯선 표식들이다. 언제부터 쓰였고 얼마나 자주 덧붙여졌는지 짐작하기 어려우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각기 다른 규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주석단에서 광장을 바라보면 대형의 맨 앞줄 왼쪽 바닥부터 일련번호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데, 2015년 열병식에선 각각의 번호마다 3개의 종대가 줄지어 섰다. 주석단 중앙을 기준으로 광장을 양쪽으로 가르는 경우도 있다. ‘1-1’ ‘1-2’ ‘1-3’ 순서로 이어진 숫자의 조합에서 앞 숫자는 종대, 뒤 숫자는 횡대 번호를 의미한다. 주석단에서 멀어질수록 횡대 번호가 늘어나고 광장의 가장자리로 갈수록 종대 번호가 늘어나는 식이다. 그 외에도 각기 다른 크기와 색깔의 표식이 무수히 많지만 가로세로 간격이 일정한 덕분에 소규모 인원의 경우 어떤 규칙을 택하더라도 오와 열을 맞춰 서는 게 가능하다.
광장의 숫자와 기호는 행사에 동원된 주민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지휘하기 위한 장치다. 열병식에서 카드섹션을 펼치는 일명 ‘바닥조’ 주민들도 각자 부여받은 바닥 번호에 맞춰 서야 한다. 탈북민 출신 김흥광 NK TV 대표는 “바닥조가 자기 숫자를 외워 지정된 위치에 서면 연출자는 바닥 표식을 기준으로 카드섹션을 지휘한다”고 설명했다.
김일성광장뿐 아니라 금수산태양궁전 광장과 대동강 둔치 등 평양 시내 주요 장소는 물론이고 지방 도시나 시골 마을 광장에도 이러한 표시가 되어 있다. 심지어 유치원 마당에까지 가로세로 일정한 간격으로 점이 찍혀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에 대해 “북한은 지시한 대로 오차 없이 움직이는 가장 정교한 나라다. 이러한 바닥 표식들은 통제와 감시가 일상화한 북한 사회의 일면”이라고 말했다.
#탈북민이 전하는 행사 동원 주민의 고충
“행사 참가 인원이 많고 대기 시간이 길어 순서를 기다리다 동상에 걸리는 일이 다반사다.” 인민군 출신인 김정아 통일맘연합회 대표는 겨울철 동원 행사의 고충을 이렇게 전했다. 과거 열병식 훈련 도중 하반신 마비 증세를 겪기도 한 그는 “군인들이 발소리를 크게 내기 위해 신발 밑창에 징을 박는데 그 못에 찔려 파상풍에 걸리기도 한다”면서 “북한의 군중 동원은 심각한 인권 침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탈북민들에 따르면 열병식을 위해 군인은 1년, 주민은 3개월간 연습에 동원된다. 공장이나 기업소 단위로 동원된 주민들은 꽃술 등 카드섹션에 쓸 도구도 직접 준비해야 한다. 연습기간이 6개월에 달하는 아리랑 축전 역시 주민들에겐 만만치 않은 동원 행사다.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아리랑 축전에 동원된 동료 학생이 충수염에 걸렸는데 말을 못하고 끝까지 연습에 참가하다 맹장이 파열된 적도 있다”고 전했다.
동원에 대한 보상은 행사에 따라, 신분에 따라 다르다. 김성민 대표는 “아리랑 축전이 끝나면 공로 메달 또는 TV를 포상으로 주거나 하다못해 가방이라도 챙겨주는 분위기”라고 했다. 열병식에 차출된 군인들 역시 행사 당일 새 군복과 신발을 지급받고 휴가도 갈 수 있지만 일반 주민의 경우엔 아무런 보상이 없다. 김정아 대표는 “평양 시민들은 원래 당성도 좋고 이런 행사 동원에 익숙해 보상이 없어도 별다른 불만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김주성기자 poem@hankookilbo.com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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