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명절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거나 그리워할 것이다. 나도 고향을 그리며 이청준의 ‘귀향 연습’을 오랜만에 꺼내 읽어본다. 오랜 도시 생활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지섭은 힘겹고 지저분한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그만 고향으로 돌아갈까 생각한다. 그러나 흉한 몰골로는 도저히 고향마을을 찾아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온갖 병을 안은 채 그냥 저냥 도시에서 자신을 견뎌내고 있는 중에 고향 친구의 편지를 받는다. 과수원을 하고 있는 친구는 지섭에게 얼마간이라도 심신을 좀 쉬어 가라고 권한다. 그 과수원은 지섭의 고향과 약간 떨어진 곳이어서 당장은 고향에 가고 싶지 않은 지섭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친구의 집에는 그의 어린 조카 훈이가 요양 차 머물고 있다. 어느 날 대화 속에 훈이가 대뜸 묻는다. “아저씬 고향을 가지고 계셔요? 사람이면 누구나 거기서 자기의 괴로운 삶을 위로 받고 살게 마련이라는 고향이라는 것 말이어요. 전 고향을 가지고 있진 않거든요” 훈이는 단순히 태어난 곳의 의미를 넘어 어떤 정신의 요람으로서의 고향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훈이가 고향이란 것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누군가 훈이의 병은 고향을 갖지 못해서 생긴 것이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자신의 병을 잊어버리기 위해 지섭으로부터 고향 이야기를 들으며 고향이란 것을 배우고 싶다고 한다.
사실 지섭의 오랜 병 배앓이도 고향에 뿌리를 둔 것이다. 지섭도 내친 김에 배앓이도 달랠 겸 잘됐다 싶어 자신의 고향을 생각해보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20년 가까이 찾은 적이 없는 고향이라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먼저 바다와 맞닿은 산비탈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종일 김매기를 하는 동안 어린 지섭은 밭머리 무덤가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며 지냈다. 햇빛이 반짝이는 바다에 고깃배가 떠있었고 산에는 사람들의 노랫가락이 바람에 실려 돌아다녔다. 다시 떠올려보니 완전한 행복이었다.
훈이가 라디오를 듣지 않으면 잠이 안 온다는 말을 듣고 지섭은 어른들의 이야기 소리를 들어야 잠이 오던 어린 시절을 기억해낸다. 성인이 되어서도 누군가의 육성이나 라디오의 말소리를 듣지 않으면 잠이 잘 오지 않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훈이가 묻는다. “그러니까 아저씨에겐 아직도 그런 고향이 간직되어 있다는 거 아녜요?” 두 사람이 고향 이야기를 주고 받는 중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 지섭의 배앓이 증세가 조금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점은 훈이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하찮은 상징의 이야기였지만, 마음 속에 고향을 세워가는 훈이에게는 소중한 것일 수도 있었다.
훈이의 마지막 질문은 지섭을 얼어붙게 한다. “아저씨가 지금까지 들려 주신 이야기, 그게 다 정말이어요? 그럼 어째서 그렇게 좋은 고향 동네를 한번도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으셔요? 여기서 멀지도 않다면서 말예요.” 뜨끔했지만 지섭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까지 지섭에게 고향은 행복보다 상처의 무게가 컸다. 그래서 고향에 가지 못하고 고향과 가까운 친구 집에 온 것이다. 훈이에게 더 이상 들려줄 고향이 없어진 지섭은 다시 도시로 향한다. 이번엔 연습으로 그쳤지만 다음 번엔 고향과 정직하게 마주할 용기가 생길지 모른다.
소설 ‘귀향 연습’은 이청준 작가 자신의 체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작가가 고향을 대하는 마음은 ‘눈길’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눈길’에서의 고향은, 이제는 팔려 버린 집을 향해 새벽 눈길을 따라 어머니가 외롭고 서럽게 걸어가던 곳이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행복과 상처의 기억이 공존한다. 늘 그립지만 쉽게 가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귀향 연습을 한다. 이청준 문학이 보여주듯 고향은 인생의 뿌리이자 현재를 먹여 살리는 젖줄이다.
제갈인철 북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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