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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중국 SF 굴기가 시작되었다

입력
2018.02.02 19:0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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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츠신5] /2018-01-31(한국일보)
[류츠신5] /2018-01-31(한국일보)

<47> 중국 SF 굴기 시대 연 류츠신

2015년 겨울,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휴가를 보내며 중국 SF소설을 읽었다. 바로 그해 여름에 영미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SF문학상인 ‘휴고상(Hugo Award)’을 수상한 류츠신(劉慈欣)의 ‘삼체’였다. 아시아 언어로 처음 발표된 작품이 영어로 번역 출간된 뒤 휴고상을 받은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오바마는 작년 가을에는 전직 미국 대통령 신분으로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글로벌교육정상회의(GES)'에 참석했다가 류츠신을 만나서 그의 차기작에 대해 질문도 하고 책에 서명도 받았다.

중국 영화산업의 동향을 전하는 미국 매체인 ‘차이나 필름 인사이더’는 작년에 주목할 만한 기사를 냈다. 중국의 대표적인 문화수출상품은 그동안 ‘쿵푸’였지만 이제는 ‘SF’로 옮겨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류츠신에 이어 하오징팡(郝景芳)이 휴고상을 수상하는 등 중국SF문학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고, 중국영화계는 탄탄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대작SF영화 제작에 속속 나서고 있다. 생각보다 빠른 시일 안에 할리우드산 못지않은 중국SF영화들이 극장에 걸릴지도 모른다. 바야흐로 중국 SF 굴기(崛起)가 시작된 것이다.

SF로 접근한 중국 현대사

류츠신의 ‘삼체’에는 문화대혁명 시절에 참혹하게 부모를 잃고 오지로 ‘하방(下放)’될 처지에 놓인 젊은 여성 과학자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기에 특별 조치로 구제되고, 대신 비밀리에 건설된 전파망원경 관측기지에서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70년대 당시 중국 정부는 미국과 소련 등 세계 강국들이 외계의 지적생명체를 찾는 천문학 연구에 투자하는 모습을 보고 중국 사회주의의 위대한 이념을 우주에도 전파해야 한다며 똑같은 분야에 연구 투자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외계인이 보낸 전파 신호를 포착하고 그에 담긴 메시지를 해독하기에 이른다. 그 내용은 놀랍게도 ‘우주에서 당신들의 존재를 숨겨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뼛속 깊이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낀 주인공은 의외의 행보를 보인다.

세월이 흘러 21세기의 중국에서는 과학자들 사이에 기묘한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더니, 외계인이 지구를 향해 침공해 오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중국 정부를 비롯한 세계 각국은 전 지구적인 노력을 기울여 이에 대한 대비를 하려 하지만, 외계인은 이미 양자물리학을 이용한 압도적인 과학기술로 지구 전체의 동향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외계인의 지구 정복을 지지하는 지구인들의 비밀결사까지 이미 각계에 침투하여 조직적 활동을 벌이고 있다. 외계인의 우주함대가 시시각각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동안, 지구인들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 격변을 연달아 경험하게 된다.

세계가 주목하게 된 중국 SF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SF잡지는 중국의 ‘과환세계(科幻世界)’이다. 1979년에 창간된 이 잡지는 현재 매월 13만부 가량을 발행하고 있으며, 한창 때에는 30만부까지도 유통된 기록이 있다.

서양에서 처음 태동한 SF는 ‘해저2만리’, ‘지구에서 달까지’ 등을 쓴 프랑스의 쥘 베른과 ‘우주전쟁’, ‘타임머신’ 의 작가인 영국의 H.G.웰스가 이 장르의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다. 서구 열강들과 일본에게 극심한 압박을 받던 19세기 말에 중국(청나라)의 지식인들은 과학기술력을 키워야 한다는 자각을 하는 동시에 일종의 과학계몽 수단으로서 SF라는 장르에 대해서도 인식하고 있었다. 당대의 대표적인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루쉰(魯迅)은 직접 쥘 베른의 소설을 번역하기도 했다. 이렇듯 중국에 SF가 소개된 역사는 결코 짧지 않으며 20세기 들어서도 중국 공산당의 정책적 지원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 문학계에서 SF는 일정한 지분을 계속 누려왔다. 이러한 흐름의 연장에서 등장한 류츠신은 서양의 어떤 SF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놀라운 상상력을 담은 작품을 선보이며 중국SF의 저력을 드러낸 것이다. 국내에도 소개된 그의 ‘삼체’와 ‘삼체: 암흑의 숲’은 기본적으로 과학기술적 상상력에 중점을 두는 ‘하드(hard)SF’이지만 동시에 사회과학적, 인문적 묘사나 서술의 치밀함에도 감탄하게 된다. 게다가 작품 전반에 짙게 배어있는 ‘중국’이라는 향이 강렬하여 기존의 서구권이나 일본 SF콘텐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또 다른 유니크함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중국 SF의 세계적 성공 요인

류츠신을 세계SF계에 화려하게 등장시킨 일등공신으로 번역가인 켄 리우(Ken Liu)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시에서 태어나 11세 때 미국으로 이민한 켄은 중국어와 영어를 모두 모국어처럼 능숙하게 구사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휴고상을 수상하기도 한 빼어난 SF작가이다. 게다가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 공학 분야의 변호사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 깊고도 넓은 지식과 안목을 갖추어 SF번역가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자격을 갖추었다. 작년 8월 헬싱키의 제75차 세계SF대회에서, 그리고 11월 베이징의 중국SF성운상 시상식에서 켄 리우를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자신이 작가보다 번역가로서 더 평가받는 현실에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양국 SF문학계의 가교 역할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중국은 2015년 류츠신의 휴고상 수상을 기점으로 그 이후를 중국SF의 본격적인 세계 진출 시기로 간주하고 있다. ‘중국SF성운상’은 ‘중국어로 쓰여진 세계의 모든 SF’를 대상으로 삼는데, 작년에 열린 시상식에 내걸린 구호는 ‘세계로 향하는 중국SF’였다. 2016년에 휴고상 단편부문을 수상하여 중국에 2년 연속 휴고상을 안긴 하오징팡은 30대 초반의 여성 작가로서 중국SF작가군의 두터운 저변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중국SF는 이미 ‘과환세계’ 외에도 다른 독립적인 몇몇 미디어집단들이 할거하면서 긍정적인 내부 경쟁 체제를 이루고 있다. 베이징의 미디어집단인 ‘미래사무관리국(FAA)’은 ‘부존재일보(The Non-Exist Daily)’라는 온라인 매체를 통해 한국의 ‘거울’ 웹진과 매월 양국의 단편 SF 한 편씩을 교환 소개하는 프로젝트를 지난해부터 진행하고 있으며,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시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과환세계’ 역시 한국 SF의 번역 소개에 관심을 갖고 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중국SF가 세계로 진출하면서 자연스럽게 SF와 결합된 동아시아의 전통 문화 콘텐츠들도 더 많은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의 SF가 영미권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일도 이미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이런 추세는 길고 넓은 시야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영미권의 SF문학계에서는 진작부터 세계의 패권 국가가 된 미래의 중국을 묘사한 SF들이 꾸준히 생산되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미래의 한국이 사실상 중국의 영향권 안에 종속된 상황을 그린 작품도 있었다. 이제 중국SF의 본격적인 세계 진출이 가시화 된 상황에서, 머잖아 할리우드 슈퍼영웅물 대신에 중국의 전통 설화나 기담의 주인공들이 스크린을 채울 날이 올지도 모른다. 결국 문화적 열강들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어떻게 독자적인 정체성을 계속 살려 나갈지 모색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될 것이다.

박상준ㆍ서울SF아카이브 대표

류츠신 1963년 6월 23일 ~

중국 산시(山西)성 양취안(陽泉)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광산 엔지니어였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어린 시절에는 조상들이 살던 허난(河南)성 뤄산(羅山)현에서 한동안 지냈다. 화베이(華北)수리수력대학을 졸업하고 발전소의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했는데, 본인의 말에 따르면 직장이 깊은 산 속이라서 일찍 해가 졌고 퇴근 뒤 기숙사 생활의 무료함을 달랠 양으로 마작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큰돈을 잃고는 ‘계속 이렇게 살 건가?’라는 생각을 한 끝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중학생 때부터 소설 습작을 했으며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이나 아서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같은 작품을 통해 SF에 입문했다고 한다.

1999년에 단편 ‘고래의 노래’를 잡지 ‘과환세계’에 발표하면서 SF작가로 데뷔했으며 이 해부터 8년 연속으로 ‘과환세계’에서 수여하는 SF문학상인 '은하상'을 수상하는 대기록을 세우면서 단숨에 중국SF계의 대표 작가로 떠올랐다.

2006년부터 ‘과환세계’에 연재를 시작한 장편소설 ‘삼체’는 2008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 후속편인 ‘삼체: 암흑의 숲’과 ‘삼체: 사신영생’까지 이어졌다. ‘지구의 과거’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들은 대단한 인기를 끌어 수백만 부가 판매되었고 영어로도 번역되어 1부가 영미권 SF계 최고 권위인 휴고상 장편부분을 수상했고 후속편들도 후보에 올랐다. ‘삼체’를 포함한 그의 작품 두 편이 현재 영화로 제작 중이다.

영화 삼체의 포스터. /2018-01-31(한국일보)
영화 삼체의 포스터. /2018-01-31(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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