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 혁신 기업 원조 격인 프린터ㆍ복사기 업체 제록스가 일본 기업 후지필름 품에 안긴다.
제록스는 지난 31일(현지시간) 일본 후지필름 홀딩스와의 합작 회사인 후지제록스와 사업을 통합한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 니혼게이자이 신문 등 외신에 따르면 고모리 시게다카 후지필름 홀딩스 회장이 이날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지필름과 제록스의 합병 소식을 발표했다.
후지제록스는 1962년 후지필름과 제록스가 50%씩 출자해 설립한 회사로 이후 제록스가 경영난에 빠지면서 2001년 후지필름 홀딩스 지분이 75%까지 높아졌다. 인수ㆍ합병은 후지제록스가 61억달러를 들여 후지필름 지분 75%를 취득한 뒤 후지필름이 제록스가 발행하는 신주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절차가 마무리되면 후지필름의 제록스 지분은 50.1%가 된다. 합병 후 사명은 후지제록스로 변경한다. 후지필름은 통합 후 비용 절감을 위해 전 세계 직원 1만명을 감원할 계획이다.
미국 언론은 사무환경 산업 혁신의 상징인 제록스의 이번 인수ㆍ합병 소식을 큰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1903년 설립된 제록스는 1938년 발명가 체스터 칼슨이 개발한 복사 기술 특허권을 사들인 뒤 1959년에 사무용 복사기를 개발해 전 세계 사무실의 필수품으로 만들었다. 지금의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사명 제록스가 ‘복사하다’라는 의미의 동사로 쓰일 정도로 전설적인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1970~1980년대 사무실이 배경인 오피스 무비에는 늘 제록스가 등장했다.
하지만 미국 반독점법 집행기관의 복사기 특허 개방 명령으로 일본 복사기 기업이 잇달아 등장했고, 이메일 등 전자 문서 전송 방식이 확산하면서 매출이 급격히 감소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두고 ‘경쟁력의 함정(Competency Trap)’에 빠졌다고 분석했다. 경쟁에서 이긴 기업이 기존 비결에 집착해 새로운 환경에서 실패하는 현상을 뜻하는 말로, 한때 대표적인 혁신기업이던 제록스가 디지털 혁명의 파고를 넘지 못해 주저앉았다는 것이다.
제록스의 몰락은 지난해 말 최대 주주인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의 압박으로 이미 예견됐다. 당시 그는 “제록스는 여전히 잠재력이 있지만 가시적인 변화 없이는 (디지털 시대에 순식간에 몰락한) 필름 제조사 코닥의 길을 걸을 수 있다”며 CEO 해임과 매각 등을 주장한 바 있다.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