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반 위 우아한 자태, 간결하고 힘 있는 스텝, 화려한 점프와 스핀.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에 등장한 피겨 여왕은 1만5,000여 관중을 매혹시켰다. 전광판에 나타난 숫자는 228.56,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역대 최고점이다. 벅찬 감격에 흐르는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한국 피겨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건 김연아(28ㆍ은퇴)와 함께 온 국민도 함께 울었다.
그렇게 김연아는 동계올림픽의 아름다운 꽃이 됐다. 2014 소치올림픽에서도 흠 잡을 데 없는 연기를 펼쳤지만 석연치 않은 판정 논란 속에 은색 메달을 목에 걸었다. 결과는 아쉬워도 여왕은 품격을 지켰다. 금메달리스트 아델리나 소트니코바(러시아)를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 이후 여왕은 빙판을 떠났다.
어느덧 4년이 흘렀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새 여왕을 기다린다. 대관식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은 러시아의 두 여인이다. 세계 최강자로 꼽히는 예브게니아 메드베데바(19)와 무섭게 떠오른 알리나 자기토바(16)가 그 주인공이다. 2016~17시즌까지만 해도 메드베데바를 위협하는 선수가 나오지 않아 당연히 평창의 여제가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올림픽 시즌인 2017~18시즌 시니어 무대에 데뷔한 자기토바가 출전하는 대회마다 우승하며 양강 체제를 구축했다.
‘포스트 김연아’ 시대를 연 메드베데바
메드베데바는 김연아의 세계 기록을 7년 만에 갈아치우며 피겨 여자 싱글의 ‘포스트 김연아’ 시대를 열었다.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80.85점), 프리스케이팅(160.46점), 총점(241.31점) 세계 기록을 보유 중이다. 모두 지난해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 팀 트로피에서 경신했다. 세계선수권대회와 그랑프리 파이널은 두 차례 제패했다.
피겨스케이팅 선수 출신의 엄마를 둔 메드베데바는 자세 교정을 위해 세 살부터 스케이트를 탔다. 본격적으로 피겨에 입문한 시기는 2007년이다. 2013년 8월 처음 출전한 주니어 그랑프리 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뒤 2014~15시즌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을 제패하고 다음 시즌 곧바로 시니어 그랑프리 파이널도 평정했다.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우승 직후 시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을 제패한 것은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일본)에 이어 메드베데바가 세 번째다. 2015~16시즌 우승 6회, 2016~17시즌 우승 6회로 최고의 성적을 냈던 메드베데바는 2017~18시즌에도 4개 대회 연속 정상에 올랐지만 지난해 11월 NHK 트로피 우승 이후 발목 부상 탓에 잠시 쉬어갔다. 메드베데바는 자신의 트위터에 아이돌 그룹 엑소(EXO) 멤버들의 사진을 올리는 등 엑소 팬으로 알려졌다.
판도를 흔든 추격자 자기토바
메드베데바가 부상의 덫에 걸렸을 때 자기토바는 혜성처럼 등장했다. 5세 때 피겨를 시작한 자기토바는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인 아버지를 따라 잠시 아이스하키 스틱을 잡기도 했다. 자기토바의 부모는 첫딸인 자기토바가 태어난 지 1년 동안 이름을 두고 고민하다가 러시아의 2004 아테네올림픽 리듬체조 금메달리스트 알리나 카바예바의 연기에 감명받아 ‘알리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리듬체조 스타의 ‘금빛 기운’을 이어받아서인지, 자기토바는 2016년 8월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처음 정상에 오른 다음 2016~17시즌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2017년 주니어 세계선수권까지 휩쓸었다. 지난해 9월에는 시니어 무대에 데뷔하자마자 우승했고, 같은 해 12월엔 메드베데바가 부상으로 빠진 그랑프리 파이널과 러시아선수권대회를 제패했다.
기술 프로그램 구성은 자기토바가 메드베데바를 앞선다. 점프 과제 7개를 후반부에 집중 배치했다. 점프 기술 점수는 체력이 떨어질 시점인 연기 중반 이후에 점프를 뛰면 10%의 가산점이 붙는다. 다만 시니어 무대 경력이 적어 예술성을 따지는 프로그램 구성 점수에선 메드바데바에게 뒤진다.
평창 전초전은 자기토바의 승리
평창올림픽 전초전으로 관심을 모았던 둘의 첫 맞대결에선 자기토바가 이겼다. 자기토바는 지난 21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끝난 유럽선수권대회에서 총 238.24점을 받아 금메달을 획득했다. 쇼트프로그램(80.27점)과 프리스케이팅(157.97점)에서 모두 개인 최고 점을 갈아치우고 정상에 올라 기쁨도 두 배였다.
ISU 공식 홈페이지는 “자기토바가 스위스 시계처럼 정확한 스케이팅을 했다”고 평가했다. 자기토바는 “아침 훈련 시간과 프리스케이팅 시간 사이 휴식 시간이 길어 긴장했지만 클린 연기를 하면서 즐기고 싶었다”며 “우승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기뻐했다.
부상 이후 복귀전을 치른 메드베데바는 232.86점으로 2위에 올랐다. 메드베데바가 출전한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한 것은 2015년 11월 그랑프리 대회 준우승 이후 처음이다. 전반적으로 큰 실수는 없었지만 트리플 러츠 점프에서 ‘에지 사용에 주의하라’는 어텐션 판정을 받았다. 메드베데바는 “모든 선수들은 대회를 치를 때마다 실력이 좋아지고, 공백이 길수록 기량이 떨어진다”며 “두 달 간의 공백 이후 나선 대회치고는 결과가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김지섭기자 onio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