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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칼럼] 우리의 소원은

입력
2018.01.25 13:54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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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말에 ‘우리의 소원은 전쟁’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냈다. 지금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판권을 사간 제작사 덱스터스튜디오가 영화 ‘신과 함께’로 대박을 터뜨렸기 때문에 나도 덩달아 기쁘다. 내 책도 곧 천만 영화가 될 거라는 근거 없는 꿈에 부풀어 본다.

‘우리의 소원은 전쟁’은 멀지 않은 미래의 남북관계를 소재로 삼았다. 다들 짐작하다시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 제목을 비틀어 제목을 지었다. 물론 나는 결코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고, 꿈에도 소원이 통일이고, 이 목숨 바쳐서 통일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역으로 어떤 무력충돌도 없이 평화롭게 남북관계가 개선돼 통일에 근접한 상황을 그렸다.

원고를 구상할 즈음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통일대박론’을 주장했다. 남한의 자본과 기술력에 북한의 노동력과 천연자원이 더해지면 놀라운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글쎄, 국익이라는 높은 시선에서 보면 그럴듯한 논리다. 그런데 그런 결합을 한국의 저임금 노동자 처지에서 바라보면 섬뜩하지 않나. 그들이 ‘싸고 풍부한’ 북한의 노동력과 어떻게 경쟁할 수 있단 말인가. 남한의 육체노동자들에게도 통일은 대박인가.

북한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지금도 남한에서 받는 차별대우가 서럽다며 한탄하는 탈북민이 많다. 북한 사람이 남한에 내려와 일하는 상황이든, 남한 기업인이 북한에 올라가 공장을 세우는 상황이든, 그런 차별과 모멸이 커지면 커지지 줄어들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북한의 젊은 여성 대부분은 남한 남자와 결혼을 꿈꿀 테고, 북한 젊은 남자들은 남한이라면 이를 갈게 될 것 같다.

통일은 대박일까? 누군가에게는 그럴 것이다. 자본과 기술력이 있어서, 싼 노동력과 풍부한 천연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개중에는 북한의 신흥 기업인들도 더러 있을 테지만.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상처 입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루하루 버티듯 사느라 미래를 대비할 여력도, 기회를 활용할 자원도 없는 이들이라면 특히. 사회가 너무 빨리 변하면, 약자들은 뒤처지다 희생되기 일쑤다.

혹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일까? 그런데 평화라는 말은 너무 추상적이다. 수만 명의 인권이 무참히 탄압받고 있다고 하는 정치범수용소는 조용하고 평화롭다. 무력도발에 희생된 젊은이들이 묻힌 묘소 앞은 적막해서 평화롭다. 그게 우리의 소원인가? 평화라는 말은 때로 보자기처럼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한데 묶어 감싸고는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한다.

남북관계에 있어 우리의 소원이자 한국 정부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약자 보호’라고 생각한다. 자본, 기술력, 노동력, 천연자원은 난 모르겠다. 대한민국은 기업이 아니라 국가이고, 나는 투자자가 아니라 국민이다. 대한민국은 보호해야 할 인격체가 아니라 상상의 공동체이므로, 나는 ‘남조선 각계가 우리에게 고마워한다’는 노동신문 논평에 자존심 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올림픽을 잘 치르면 얻게 된다는 국위 상승효과에도 큰 관심이 없다.

나는 무엇보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원하고, 전쟁 위협도 없기를 바란다. 전쟁이 나면 약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치기 때문이다. 전쟁 위협은 약한 사람들을 겁먹게 하고, 종종 그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 나는 급격한 통일에도 반대한다. 약자들이 다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나와 같은 마음이면 좋겠다. 늘 약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대북정책을 짜기 바란다. 여기에는 북한의 약자도 포함된다.

그리고 인정하자. 우리의 외교력과 군사력은 주변 정세를 이끌거나 통제할 수준이 못 된다. 큰 바람이 언제 불지 잘 살피다가 집안 가구를 고정하고 창틀에 테이프를 바르는 업무와, 태풍의 진로를 바꾸는 불가능한 목표 사이 어딘가에 한국 정부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평창올림픽 준비 과정을 지켜보는 마음이 개운치 않다. 대통령과 총리와 장관이 선수들에게 양보를 강요했다. 서울역에 있던 노숙인들은 경찰의 ‘협조요청’에 따라 현송월이 오기 전에 자리를 옮겼다. 그 각각의 현장에서 누가 약한 사람이었는지는 명확하다.

남북관계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약자들이 훨씬 더 많다. 협상에서는 주는 게 있어야 받는 게 있고, 주고받기가 동시에 이뤄지지 않음도 안다. 일단 기다릴 따름이다. 얼음을 녹이는 수준이 아니라 깨부숴가며 ‘해빙 분위기’를 만들었다. 당연히 올림픽 이후 군사회담으로까지 이어지리라 믿는다. 원자폭탄, 버섯구름, 낙진 같은 말만 들어도 잠자리가 뒤숭숭한 이 땅의 수많은 약자들이 그 혜택을 보게 해 달라. 젊은 선수들의 양보가 헛되지 않게 해 달라. 그때까지 박수는 보류한다.

행여 남북단일팀 구성의 성과를 ‘세계인의 이목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에서 찾지는 말기 바란다. 세계의 관심을 받아서 얻는 이득도 대개 자본과 기술력을 갖춘 강자들이 더 많이 챙겨간다. 세계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라면 선수의 희생도 필요하다고 여길 정도로 우리 국민이 촌스럽지도 않다.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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