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괌 전투에서 일본군이 패퇴한 1944년 8월 이후 27년여 동안 괌 밀림에 은신해 살던 전 일본제국 육군 보병 제38연대 오장(伍長ㆍ하사) 요코이 쇼이치(橫井庄一, 1915~1997)가 1972년 1월 24일 주민들에게 발각됐다. 그는 괌 남쪽 탈로포포(Talofofo) 폭포 인근 강가로 먹을 거리를 찾아 나섰다가 새우잡이 어망을 살피러 간 주민 둘의 눈에 띄어, 몸싸움 끝에 붙들렸다.
2월 초 일본으로 송환된 그는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났다는 사실을 52년 무렵 알았지만 “황군은 포로로 잡혀 수치를 당하느니 전사하는 것이 낫다고 교육 받았기” 때문에 항복할 수 없었다고, “살아 돌아와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함께 은신했던 둘은 64년 홍수에 쓸려 숨졌다고 한다.
일본 아이치 현에서 태어난 그는 한 양품점 점원으로 일하던 1935년 제1보충병으로 4년 간 복무했다. 하지만 제대한 지 2년 만인 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다시 징집돼 만주를 거쳐 43년 2월 괌 주둔군으로 배치됐다. 괌은 태평양 북마리아나 제도와 함께 일제의 아시아(필리핀, 중국) 및 본토 1차 방어선이자 대양 전진기지였다. 일본군은 41년 12월 1차 전투에서 미국령 괌을 점령했다. 쇼이치가 치른 2차 전투(44년 7월 21일~8월 10일)는 미국의 탈환전이었다. 그 전투에서 미 해병과 육군은 3,000여 명(7,000여 명 부상)이 전사한 반면 일본군은 1만8,000여 명(포로 1,250 명)이 숨졌다. 전형적인 옥쇄작전이었다.
귀국 후 쇼이치는 “신민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 죄송하다.(…) 비록 세상은 바뀌었지만 천황에 대한 나의 충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는 잇따른 강연과 인터뷰 요청에 응해 괌 토굴에서 과일과 물고기로 연명했던 세월을 증언했고, 1974년 참의원 선거 무소속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77년 ‘요코이, 괌에서 보낸 28년 비밀의 삶’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제작됐다. 이후로도 2차대전 잔류 일본군 오노다 히로(1922~2014)와 나카무라 데루오(1919~1975)가 각각 74년 3월과 12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밀림에서 발견됐고, 2005년 필리핀 민다나오 산악지역에서도 다수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누구는 국가주의와 이데올로기 일반의 섬뜩함을 느꼈고, 또 누군가는 ‘애국’과 ‘군인 정신’의 전범을 보기도 했을 것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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