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천운영의 심야 식탁] 주스와 젤리, 그리고 키스... 달콤했던 염장질의 맛
알림

[천운영의 심야 식탁] 주스와 젤리, 그리고 키스... 달콤했던 염장질의 맛

입력
2018.01.24 04:40
20면
0 0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휴일. 곰 모양 젤리를 먹으며 철 지난 로맨스영화를 보다가 문득 떠오른 풍경 하나. 스페인 시골마을 작은 광장, 햇살 좋은 야외카페. 나란히 앉은, 입매와 눈매가 똑 닮은 백발의 노부부. 그 앞에 나란히 놓인 두 잔의 망고주스. 검정색 빨대와 빨간색 빨대.

노부부가 동시에 빨대를 입에 문다. 두 마리 사이 좋은 비둘기들처럼, 입술을 축이는 듯 아주 조금. 쪽. 주스 잔 사이에는 젤리접시가 놓여 있다. 여자가 사과모양 젤리를 집는다. 남자는 포도색 젤리. 그들은 젤리를 천천히 오래오래 씹는다. 젤리 하나를 다 먹고 나면 주스로 입을 축이고. 다시 젤리를 씹으면서 먼 곳을 바라보고. 주스를 마시기 위해 카페에 온 것이 아니라 젤리를 먹기 위해 온 사람들처럼. 젤리를 씹고. 빨대로 망고주스를 빨아 마시고. 흐뭇하게 먼 곳을 바라보고. 말없이 천천히 그 일을 반복하고 있다.

거리의 악사가 아코디언에서 피리로 넘어가는 동안, 접시에는 노란색 바나나모양 젤리 두 개만 남았다. 남자가 하나를 입에 넣고 남은 접시를 여자 쪽으로 밀어준다. 여자가 마지막 젤리를 집어 든다. 남자가 지갑을 꺼낸다. 돈을 꺼내 셈을 하는 것은 여자.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말없이 그 일을 수행한다. 같은 속도로 주스를 마시고. 바나나향 젤리를 싫어하거나 좋아하고. 같은 방식으로 돈을 내고. 같은 속도로 늙어가고. 사랑보다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함께한 시간일 터.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안 화장실 쪽으로 간다. 여자가 자리를 비우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머지 망고 주스를 한번에 비운다. 심술궂은 상상을 해본다.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빨대로 주스를 마시고 있었던 거라고. 여자의 속도에 맞춰 살아온 자신의 시간들을 안타까워하고 있을 거라고. 이 여자만 아니었다면 결코 놓치지 않았을 다른 여인을 그리워하고 있을 거라고. 이 여자의 취향으로 옷을 입고 이 여자의 취향으로 집을 꾸미는 동안, 변해버린,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자신의 취향과 취미를 그리워하고 있는 중이라고.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여자가 돌아왔다. 여자가 자리에 앉는 것과 동시에 남자가 일어난다. 이번엔 남자가 화장실 쪽으로 간다. 여자는 무언가를 걱정하는 사람처럼 흘끔흘끔 안쪽을 바라본다. 여자가 남은 주스 잔을 다 비우고, 휴지로 입에 묻은 주스를 닦는 사이, 남자가 돌아왔다. 주스잔도 비었고, 젤리도 다 먹었고, 계산도 끝냈고 화장실까지 다녀왔으니, 카페를 떠날 일만 남았다. 팔짱을 끼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그들의 익숙한 집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그것이 그들 노부부가 마지막으로 내게 보여줄 장면이었다. 그런데 아주 잠깐, 내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그들은 키스를 하고 있었다. 내 앞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풋내기 연인들처럼 열정적으로. 떨어져 있던 그 잠깐의 시간을 견딜 수 없었다는 듯이 애절하게.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가 붙었다가를 반복하는 동안, 그들의 손은 상대의 뺨으로 귓불로 박자를 맞췄다. 열정적인 키스가 끝나고 난 후, 아쉬운 두 번의 입맞춤까지 쪽쪽. 아, 이 노인네들이 정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눈을 감아도 보였다. 주스 젤리 키스, 다시 주스 젤리 키스. 눈 안에는 달콤함이 넘쳐흐르는데, 입안에는 신 침만 가득 고였더랬다. 이상하게 허기가 졌더랬다. 그래서 내게도 공짜로 나온 젤리접시를 한 번에 털어 넣었더랬다. 바나나향과 사과향과 포도향이 마구 뒤섞였더랬다. 여자와 남자가 떠나고 난 빈 자리. 빨대 두 개가 승리의 V자를 그리고 있었더랬다.

한겨울 방구석에서 로맨스영화를 보고 앉은 휴일. 초록색 젤리곰에서 요상하게 망고 맛이 났다. 햇살 좋은 이국의 야외카페에서 맛보는, 아주 싫지만은 않은, 달콤한 염장질의 맛. 결국 나는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노인네처럼 허리를 지지며, 남은 휴일을 보냈다. 이 맛은 모를 거다, 하면서.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