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 역할은 프라이버시뿐인가
건물과 담의 구분을 흐릿하게
건물에서 뻗어 나온 벽이
각 방들을 감싸며 담장 역할
담 안에 작은 정원들 생기고
동네 강아지 위해 통로도 뚫어
한국에서 담장의 역사는 수난의 역사다. 개발이 화두였던 때 아파트 단지를 둘러싼 담장은 욕망의 상징이라 손가락질 받았다. 재생이 화두가 되자 마을의 낡은 담장들은 알록달록한 벽화로 덮였다. 최근 경기 성남시 판교를 비롯한 수도권 지역은 단독주택 담장을 법으로 규제함으로써 집집마다 커튼을 내리고 생활하는 기묘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닫을 것인가 열 것인가. 사생활 보호와 조망권, 거리 미관이 얽힌 이 난제에, 경남 하동군의 ‘볼트 하우스’는 흥미로운 반문을 던진다. 닫아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열어도 안 보일 수 있지 않을까, 혹은 닫은 모습 그 자체가 경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찻길 옆 작은 미로
진주-광양을 잇는 경전선 복선화 작업으로 새로 놓인 기찻길을 따라가다 보면 비파리에 이르러 특이한 집 한 채를 만날 수 있다. 위에서 내려다 보면 작은 미로처럼 보이는 볼트 하우스는 삼형제가 노모를 위해 지은 집이다. 하동에서 나고 자라 결혼까지 한 그는 기찻길 바로 옆의 이 땅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자녀들 학업을 위해 부산으로 떠났던 젊은 시절, “언제 다시 보겠냐”고 아쉬워하는 동네 친구들을 향해 그는 “반드시 돌아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약속대로 다시 돌아온 고향 땅에는 철도 공사가 진행 중이었으나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겠다는 결심엔 변함이 없었다. 아들들은 어머니를 위해 낡은 한옥을 허물고 새 집을 지었다. 여든에 이른 어머니를 편안하게 맞아줄 집, 때마다 내려오는 아들과 손주들을 받아줄 수 있는 집, 나중엔 은퇴한 아들들이 내려와 터를 잡을 때 거점이 되어줄 집이다.
어쩌면 지극히 평범해도 될 집이 이토록 비범해진 건 건축가들이 평소 품어온 질문 때문이다. 서울에서 다수의 주택 작업을 해온 이소정ㆍ곽상준 OBBA건축사사무소 소장은 사생활과 조망권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담장의 역할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이르렀다. “우리가 거리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늘 막혀 있는 담벼락뿐이잖아요. 집주인 입장에서도 담장은 시선을 막고 마당을 제공하는 역할에 그치죠. 담장의 기능이 정말 이것밖에 없을까, 도시에 표정을 만들고 실내를 더 풍성하게 해줄 순 없을까, 하는 고민에서 이 집이 출발했습니다.”(이소정 소장)
건축가들이 택한 방식은 건물과 담의 역할을 흐리는 것이다. 건물 바깥으로 담이 둘러싼 일반적인 집들과 달리 볼트 하우스는 건물로부터 연장된 벽이 담장 역할을 한다. 동쪽 손님방과 서쪽 다용도실에서 팔처럼 뻗어 나온 벽은 각 실들을 둥글게 감싸면서 담장이 된다. 남쪽과 북쪽에서 뻗어 나온 벽들도 집을 감싸며 거실 앞뒤로 작은 마당을 만든다.
둥글둥글한 곡면을 택한 이유는 거리에 “표정”을 만들기 위해서다. “건물과 담장을 연결시키는 거라면 물론 직선도 가능했겠지요. 하지만 많은 건물이 네모 반듯하게 지어진다는 점을 감안할 때 조금 재미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나가던 사람이 우연히 보고 ‘풋’하고 웃는 것, 이런 게 도시의 표정을 만들거든요.”
표정으로 치면 볼트 하우스는 웃는 표정이다. 도로에서 본 담장은 펠리컨의 부리처럼 아래로 둥글게 쳐져 있어, 보는 이를 웃게 하거나 스스로 웃는 것처럼 보인다.
“도시에 언젠가부터 표정이 사라지고 있어”
마냥 웃는 것처럼 보이는 집은,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4m 높이의 담장에 놀란다. 만만해 보이는 펠리컨 부리는 작정하고 들여다보지 않는 한 내부를 보여주지 않는다. “주택에는 이용자가 둘이에요. 거주자와 외부인입니다. 담장이 외부를 향해 표정을 선물한다면 거주자에겐 시선과 소음을 차단하고 사적인 야외 공간을 제공할 수 있어야겠죠.”
펠리컨 부리는 실내에서 보면 작은 마당이다. 곡면에 맞춰 짜 넣은 평상과 마주보는 툇마루까지, 대여섯 명이 둘러앉기 딱 맞는 포켓형 야외 공간이다. 건축가는 거실 바닥을 살짝 높여 밖에선 내부가 안 보이되, ‘부리’ 위로 멀리 소나무 숲이 걸리는 적당한 높이를 찾아냈다. 반대편인 남쪽 담장엔 들어오는 시선이 없어 아치형으로 입구를 냈다. 햇볕을 한껏 받으면서 기찻길의 소음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동쪽의 손님방에서도 거대한 벽돌 곡면과 마주하는 호젓한 1인용 정원을 즐길 수 있다. 담장 아래엔 동네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들락거릴 수 있게 작은 아치형 통로를 뚫었다. “통으로 주어진 마당은 의외로 쓰기가 쉽지 않아요. 오히려 약간 폐쇄적인 느낌의 외부공간 여러 개가 활용도가 높죠. 집 여기저기 딸린 포켓 정원을 통해 실내에서 다양한 공간을 경험했으면 했어요. 길을 갈 때 숲을 통과하고 폭포를 지나고 오두막을 만나는 것처럼요.”
벽돌로 견고하게 쌓인 담장은 단순히 마당을 갖는다는 것 외에 ‘구조물을 소유’한다는 생소한 만족감을 안긴다. 창 밖마다 굽이치는 담장들은, 주변이 온통 논밭인 이 땅에서 화려하다 싶을 정도의 풍경이 돼준다.
“건물은 사유재이지만 도시에서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 보여진다는 면에서 공공재이기도 해요. 그런데 건물의 밍밍한 입면과 무표정한 담벼락으로 인해 우리의 도시가 언제부터인가 표정을 잃어가는 것 같아요. 이 집이 베란다에 내놓은 조그만 화분처럼 지나가는 이들에게 사소한 위트와 감동을 줄 수 있었으면 해요.”
하동=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