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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블록체인이란 ‘낭만적 꿈’

입력
2018.01.23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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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오 산업부장 young5@hankookilbo.com

게티이미지코리아
게티이미지코리아

“가상통화는 법적 지급수단을 갖지 못하고, 화폐로 기능하지 못한다.”

급기야 우리나라 화폐에 대한 최고결정권자인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18일 ‘가상통화는 화폐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그 발언에서 당혹스러움이 묻어난다.

암호화폐를 둘러싼 당국과 암호화폐 시장 참여자 사이 시각 차는 용어에서부터 드러난다. 사용자, 투자자, 언론은 두루 가상 ‘화폐’라고 부르는 데, 당국만 ‘통화’라고 고집한다. ‘화폐는 법적 지위를 갖춰야 하며, 그 지위를 부여할 권한은 오직 나에게 있다’라는 원칙이 흔들리는 상황에 대한 초조함이 담겨있다.

암호화폐는 정부의 감시에 맞서 프라이버시를 최대한 지키려는 소수 ‘사이퍼펑크’(cypherpunk) 운동가들의 꿈에서 시작됐다. 미국 수학자이자 프로그래머로 사이퍼펑크 운동 창시자 중 한 명인 에릭 휴스는 1993년 발표한 ‘사이퍼펑크 선언’에서 “프라이버시는 전자 기기 시대에 열린 사회를 위한 필수 가치이다, 정부나 기업 또는 다른 얼굴 없는 거대 조직들이 우리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해 줄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 우리의 프라이버시는 우리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정부의 권위를 대체할 수단을 ‘암호’(cypher)에서 찾는다. 결국 암호화폐가 정부나 은행 같은 공인기관 없이도 암호를 통해 양자 간에 거래의 신뢰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블록체인’이라는 이 기술은 비트코인의 창시자 ‘나카모토 사토시’(가명)가 고안했는데, 그가 밝혔듯이 그 근간은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의 발전과 여러 PC의 결합을 가능케 한 인터넷이다. 다수의 PC가 특정 방식으로 협력하면, 정부 화폐 발행과 관리 권한을 무력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감시자 없는 거래의 자유’라는 암호화폐의 기술적 잠재력이 너무 강력해 오히려 확대를 막는 족쇄가 되고 있다. 일견 탐욕스러운 금융기관이나 무능한 감독기관이 없어지면 세상이 한층 더 밝아질 것처럼 보인다.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하는 저소득층에게도 거래의 자유가 주어진다. 하지만 동시에 오랜 기간 어렵게 구축해 온 ‘금융거래의 투명성’이 무너진다. 인터넷을 통해 꼬리표 없는 돈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세상은 사이퍼펑크 운동가뿐 아니라, 부패 권력자, 탈세 부유층, 마약ㆍ무기 밀매자들이 꿈꾸는 세상이기도 하다. 어떤 정부도 이런 자유를 그냥 허용할 리 없다.

그렇다고 블록체인 기술을 금지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1990년대 닷컴 열풍 이후 또 한 번 산업구조를 밑바닥부터 뒤바꿀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한다.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소통할 통로로 여겨졌던 인터넷을 소수 거대기업이 장악했는데, 거대 포털이나 플랫폼을 거치지 않고 개인 대 개인(P2P)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블록체인 기술이 인터넷 중앙집중화의 폐해를 해결할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기대다.

블록체인 기술을 육성하면서 동시에 금융거래 투명성도 확보해야 하는 난제가 정부에 주어졌다. 그 난제를 풀 열쇠가 바로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화폐를 어떻게 규제하느냐이다. 암호화폐는 블록체인이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형성 유지 확대되는 데 핵심 유인장치다. 개인들이 암호화폐를 획득 즉 채굴하기 위해 자기 PC를 블록체인 거래 승인을 위한 서버로 제공한다. 가상화폐가 없는 블록체인은 또 다른 중앙집중식 결제망이 될 가능성이 높다.

금융당국과 은행은 30일부터 암호화폐 거래 실명제를 시행하기로 했다. 암호화폐 거래는 허용하되 그 과정에서 번 이익을 현금화할 때 과세하겠다는 조치로 일본의 암호화폐 규제와 유사하다. 당초 내놓았던 ‘거래소 폐쇄’보다 한층 스마트한 정책이다. 한발 더 나아가 앞서 금지한 암호화폐공개(ICO)도 적정한 규제와 함께 허용해야 한다.

사이퍼 펑크 운동가들의 낭만적 꿈을 실현할 기술이 이미 우리 손에 주어졌다. 정부가 이 기술의 발전을 얼마나 적절하게 유도할 것인가에 따라 우리가 4차 산업혁명의 리더가 될 것인가, 추격자에 머물 것인가가 결정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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