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수(38) 평창 동계올림픽 스키점프 경기위원장 겸 스포츠매니저는 한국 스키점프 1세대다.
1991년 동계올림픽 개최에 뛰어든 전북 무주에 국내 최초로 스키점프대가 생겼다. 고향이 무주인데다 스키장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둔 그는 자연스레 스키점프에 입문했고 한국 스키점프 사상 처음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다. 2000년대가 한국 스키점프의 황금기였다. 2003년 이탈리아 타르비시오 동계유니버시아드, 일본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 단체전에서 연이어 금메달을 땄다. 국내 선수를 합해야 10명도 채 안 되는 열악한 환경을 딛고 잇달아 금빛 신화를 쓰자 스키점프 선수들을 모델로 ‘국가대표’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그러나 정작 김 위원장에게 아오모리는 큰 아픔으로 남아 있다.
“단체전은 4명이 한 조다. 예비선수까지 5명이 국가대표였다. 단체전에 뛸 선수는 전날 경기 결과를 보고 결정했는데 내가 그 안에 들지 못했다.”
동료들은 금의환향해 주목을 받고 덤으로 병역도 면제됐지만 단체전 경기를 뛰지 못해 혜택에서 제외된 김 위원장은 쓸쓸히 해병대 장교로 입대했다. 처음에는 충격을 털어내기 쉽지 않았다. 그는 “난 낙오자였다. 군대에서 동료들이 올린 사진, 글을 보면 마음이 한 없이 무너져 내렸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새 인생을 찾았다. 장교로 근무하며 자연스레 리더십을 익혔고 운동만 하느라 미숙했던 대인 관계도 배웠다.
하지만 운명의 스키점프는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2006년 전역 후 국가대표 코치를 맡으며 예전에 함께 호흡을 맞췄던 동료들을 데리고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 참가했다.
그 즈음 영화 ‘국가대표’가 촬영에 들어갔다. “영화를 제대로 찍으려면 당신 도움이 필요하다”는 김용화 영화감독의 부탁에 김 위원장은 3개월 간 낮에는 무주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밤에는 영화촬영지 부천 실내스키장에서 하정우 등 배우들에게 기본기를 가르쳤다. 그는 “스키점프를 제대로 홍보하고 싶었고 경기 모습이 어설프게 나가선 안 된다는 생각에 강행군을 버텼다”고 털어놨다. 영화에서 하정우가 힘차게 도약해 비상하는 장면의 실제 주인공이 바로 김 위원장이다.
2012년 국가대표 지도자를 그만둔 그는 평창올림픽 조직위원회 요청을 받고 스키점프 스포츠매니저를 시작했다. 스포츠매니저는 해당 종목의 시설물 준비부터 수송, 교통 숙박 등 모든 일을 도맡는 ‘살림꾼’이다. 김 위원장은 “스키점프대에 설치한 나사 하나, 전구 한 알도 매니저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다”고 미소 지었다. 경기위원장은 대회와 관련한 모든 사항을 책임지고, 통제ㆍ확인하는 일종의 ‘설계자’다. 평창올림픽 스키점프에 배정된 3명의 주리(juryㆍ심사위원단) 멤버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두 역할을 겸하는 건 흔치 않지만 선수, 지도자를 두루 경험했고 매니저로 수 년 간 올림픽을 준비해 온 김 위원장 능력을 높이 산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국제스키연맹(FIS)이 승낙을 했다.
그는 20년 전의 선수, 8년 전 지도자에 이어 3번째로 고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참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사실 김 위원장은 2012년 지도자를 그만둔 뒤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올림픽 스키점프가 열리는 데 허투루 준비하면 무슨 망신인가. 당신의 노하우가 꼭 필요하다”는 제안을 받고 고민 끝에 수락했다. 이토록 질긴 인연의 스키점프와 올림픽을 이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펜시아 스키점프 센터가 위치한 강원 평창이 이제 ‘제2의 고향’이나 다름 없다는 그는 “스키점프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세계 최고의 스키점프 대회를 열겠다는 자부심 하나로 모든 스태프가 하나로 똘똘 뭉쳤다. 직접 경기장에 와서 확인해 보시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평창=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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