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 소년과 이한열 선ㆍ후배가 부른 ‘그날이 오면’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지난해 11월초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백주년기념관. 아홉 살 유모군이 민중가요 ‘그날이 오면’을 선창했다. 여린 목소리에 실린 동료애가 더 애틋하다. “피맺힌 그 기다림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소년의 뒤를 이어 150여 명의 성인이 화음을 쌓았다. 연세대 86학번부터 2017학번까지 ‘이한열합창단’으로 뜻을 모아 부른 합창이었다. 지난달 개봉한 영화 ‘1987’의 마지막 장면에 삽입될 곡을 녹음하는 자리였다.
소년의 작은 목소리로 시작해 사람들의 목소리가 포개져 만든 희망의 소리가 전한 울림은 컸다. 박종철 열사의 대학 후배인 황병준 음향 엔지니어를 비롯해 영화의 프로듀서 등은 노래를 듣다 현장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 합창은 “박종철, 이한열 열사가 만든 작은 물줄기에서 출발해 시민이 모여 커다란 물줄기로 일군 민주주의가 영화의 주제”(김태성 음악감독ㆍ사진)라 기획됐다. ‘그날이 오면’은 극중 연희(김태리)가 시청 광장으로 나가 버스 위로 올라간 뒤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칠 때 울려 퍼진다. 장준환 감독이 직접 선곡했다.
“정말 30년 전 한국의 모습?” 민주주의 억압 놀란 미국 연주자
뒷심을 발휘하며 내주 700만 관객 돌파를 바라보는 ‘1987’은 음악의 울림이 크다. 시대를 담은 곡들이 곳곳에 울려 퍼져 영화에서 민주주의의 산파 역을 톡톡히 한다. 영화만큼 뜻 깊은 사연도 많다. 제작진이 예산 문제로 합창단을 꾸릴 수 있을지 고민하자 이한열합창단이 자청해서 힘을 보탰다. 광주시립합창단 등에서도 돕겠다고 제작진에 연락이 왔지만, 정중히 고사했다. 프로가 아닌 평범한 시민의 목소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날이 오면’과 영화에 얽힌 사연은 외국인의 마음마저 흔들었다. 이한열합창단 녹음 후 같은 달 말 미국 로스앤젤레스 워너브라더스 스튜디오에서 현악 녹음을 할 때는 울음바다가 됐다. ‘영화 음악의 거장’ 한스 치머와 협업했던 첼리스트 스티브 에로디는 울며 ‘그날이 오면’을 연주했다고 한다.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고 큰 슬픔에 빠져서다. 김 음악감독은 “해외에선 보통 영화를 보며 음악 녹음을 한다”며 “‘1987’ 영화를 본 43명의 연주자들이 ‘저 모습이 불과 30년 전 한국의 모습이냐?’며 충격을 받았고,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청년은 누구냐’ 등의 질문을 쉼 없이 했다”고 작업 뒷얘기를 전했다.
6월 항쟁 후 나온 유재하 노래 쓰인 이유
영화에는 ‘가리워진 길’ 등 유재하(1962~1987)의 노래가 의미 있게 쓰인다. 연희는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마이마이’로 유재하의 1집 ‘사랑하기 때문에’를 들으며 학생 운동에 대한 생각에 잠긴다. 여기엔 작은 ‘NG’가 숨어 있다. 유재하의 유작인 1집은 6월 항쟁 이후 두 달여가 지나 8월에야 세상에 나왔다. 시기가 살짝 어긋나지만 유재하가 1987년을 상징하는 가수이기도 하고, ‘보일 듯 말듯 가물거리는’이란 가사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은 당시 민주주의에 대한 은유로 곡을 삽입했다. 극장에서 영화가 끝난 뒤 엔딩 크레디트가 스크린에 뜨면 강동원과 김태리가 함께 부른 ‘가리워진 길’이 흐른다. 이 곡의 녹음을 위해 강동원은 자비로 보컬 트레이너까지 섭외해 노래 연습을 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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