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앱 통해 독자사연 받고
거기에 딱 맞는 시를 추천
지난달 200여명이 신청
2009년 작가세계로 등단한 김현(38)은 시단(詩壇)의 팬덤 현상을 일으킨 ‘신서정’파 맏형 격의 시인이다. 퀴어 문화와 정치, SF물을 소재로 한 첫 시집 ‘글로리홀’(2014)로 주목받았고, 2016년 한 문예지에 한국문단의 여성혐오 실태를 고발한 기고 ‘질문 있습니다’를 발표해 파란을 일으켰다. 단편영화 감독, 영화제 기획자, 출판사 편집자, 시민단체 활동가 등을 거친 그의 현재 직업은 출판사 강좌 기획자. 화제가 된 문화계 이슈에 거의 모두 참여했던 그가 요즘 꽂힌 분야는 ‘시 처방’이다. 출판사 창비의 시 애플리케이션 ‘시요일’을 통해 신청한 독자 사연에 맞춤한 시를 추천하고 처방서를 써 주는 ‘시 처방’은 지난달 200여명이 신청했을 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다.
1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창비에서 만난 김현은 “저도 선배들의 시를 읽고 치유받은 경험이 있다”며 “시에 치유 기능이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사연은 이렇다. 초등 4학년 무렵 소년한국일보의 동시 엽서 콘테스트에서 입상하며 시인의 꿈을 키웠던 그는 중ㆍ고등학교 문예반을 거쳐 대학에서도 줄곧 등단을 준비했다. “학창시절을 시골에서 나와 원태연, 류시화의 시를 읽으며 습작했죠. 사랑에 빠진 기분과 교통사고를 비교한 연애시, 짝사랑과 욕 밖에 없는 일기를 주로 썼는데 대학에 와서 연애시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등단하고 얼마 안 돼 다 불태웠죠, ‘나 죽고 나서 발견되면 안 된다’면서(웃음).”
대학시절 한창 습작할 때 읽으며 힘을 얻었던 시가 이병률의 첫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에 실린 시 ‘오래된 집’이다. 술 마시자며 찾아온 친구가 다음 날 아침 먹을 해장국을 끓이는 장면을 담은 시는 ‘노동과 파업’을 경험해 본 적 없는 대학생에게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었단다. “(레이먼드 카버 소설 제목처럼)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시였죠. 저도 그런 시를 쓰고 싶어서 괜히 술 취한 선배한테 잘 들어갔냐 연락하고 시 쓰는 흉내를 내기도 했고요.”
진은영의 세 번째 시집 ‘훔쳐가는 노래’도 ‘시의 치유 기능’을 직접 체감한 사례다. 갓 등단 후 어디서도 작품 청탁을 받지 못해 ‘그대로 잊히는 게 아닐까’ 두려웠던 시절, 진은영 시인이 강제 철거를 앞둔 홍대 앞 음식점 두리반에서 ‘불킨 낭독회’를 열어 이 문제를 일반에 알렸고 김현은 소설가, 가수들과 낭독회에 참여하며 “신인 공포감”을 떨쳤다. 김현은 “시집에 실린 시 ‘그 머나먼’을 읽고 누군가 나를 응원한다는 느낌이 들었고, ‘멸치 아이러니’를 읽고는 나를 반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현은 지난달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 후 진로를 고민하고 있다는 한 신청자에게 ‘그 머나먼’을 추천했다. “처음에는 ‘시 처방’이 라디오 디제이가 청취자 사연 읽고 음악 선곡하는 것처럼, 독자 사연에 맞는 시를 고르면 되는 줄 알았어요. 한데 다르더라고요. 음악이 즉각적인 위로 효과를 지닌다면 시는 천천히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일어나요. 시어 한 마디 한 마디 곱씹으며, 치유받는 경험을 하시게 될 겁니다.”
28일까지 ‘시요일’ 앱을 통해 2월 ‘시 처방’ 신청자를 받는다. 출판사 측은 “이례적인 인기에 출판사는 신청자 사연과 추천 시, 처방전을 엮은 단행본 출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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