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여성들도 성별 고정관념서 자유롭지 않아
아들, 남편에 남성성 강요하는지 되돌아봐야”
“가부장제 안에서 남성들은 정치ㆍ사회ㆍ경제적으로 우월적 지위를 누리는 대신 가족이나 친구, 이웃과 친밀한 관계 맺기는 실패했습니다.
현재 은퇴세대가 ‘삼식이(집에서 세끼를 챙겨먹는 남편을 비하하는 은어)’ 취급을 받는 게 대표적 예죠. 이런 사회에서 남성이 행복할까요?”
‘성평등 사회를 만들자’고 외치는 남자, 정재훈(55)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남성성에 대한 강요가 남성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현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 3일 서울 노원구 서울여대 캠퍼스에서 기자를 만난 그는 “성별 고정관념은 남성들에게만 뿌리깊은 것이 아니다”고 했다. 여성들도 아들, 남편, 남자친구에게 남성성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는 이유이다.
- 성역할 고정관념 때문에 남성들은 어떤 불편함을 겪나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인 아버지(황정민 역)는 단 한 순간도 울지 않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홀로 독백하며 눈물을 흘린다. 가부장제는 남성에게 부양부담, 여성에게 돌봄부담을 전가하면서 여성이 주도적 가족관계를 이끌게 한 특성이 있다. 남성들은 ‘남성적 삶(일명 맨박스)’의 틀에 갇혀 있지만, 가족ㆍ사회 관계에서 점차 멀어지고 홀로 남게 된다. 이것이 가부장제가 던지는 부메랑이다.”
-가부장제가 남성에게도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얘기인가.
“2014년 기준 인구 10만명 당 자살률은 남성(38.4명)이 여성(16.1명)의 2배가 넘고, 70세 이상이 되면 남성 노인 자살률은 92.3명까지 올라간다. 노년기 가족ㆍ사회 관계망에서 여성보다 남성이 소외되고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 여성들도 ‘남자다움’을 강요하는 경우가 있는데. 운전은 남자가 해주길 바란다던가.
“성별 고정관념은 오래된 관념이다. 남성에게만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게 아니다. 사회 변화에 따라 요구되는 성별 역할은 달라져 왔지만, 한국사회는 여전히 ‘정상성’ 규범에 얽매어 있다. 전통적 남성성을 지녀야 ‘정상’이라고 규정하니 그렇지 않은 남성들은 외계인 취급을 받게 된다. 나와 다른 사람이나 소수자를 포용하는 열린 생각, 개방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적 가치다.”
- 남자들이 성 역할 고정관념을 깨고 자유로워지려면?
“존경 받는 아내, 사랑 받는 남편으로 역할 변화가 가능하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남성 스스로 인간답고 즐거운 삶을 살기 위해 지금껏 교육받은 남성성의 가치와 역할을 비틀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미국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 고발 운동인 미투(#Metooㆍ나도 당했다) 캠페인에 나선 것처럼, 남성은 성별 고정관념으로 인해 불편했던 경험이나 반성을 공유하는 ‘역미투 캠페인’이 일어나면 나처럼 공감하는 남성도 많지 않을까.”
- 백화점에 여성전용 주차장을 만드는 정책 등은 오히려 역차별이라는 비판도 있다.
“특정한 성별에 혜택을 주는 건 일정 목표(성평등 사회)에 도달하면 사라져야 한다. 그런데 여성전용 주차장은 왜 생겼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절도, 범죄 등 강력사건이 많이 발생해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역차별을 주장하려면 우리사회가 얼마나 안전해졌는가를 돌아봐야 한다.”
- 여성주의 복지론, 저출산ㆍ가족정책이 연구 분야로 알고 있다. 성평등에 왜 관심을 갖게 됐나.
“83학번인데 대학에 들어가니 다들 여성학 책을 읽더라. 아우구스트 베벨의 저서 ‘여성과 사회주의’가 내 인생을 바꿨다.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하던 19세기 남자의 입장에서 독일사회의 성차별적 현실을 다뤘는데, 이 책의 영향으로 독일 유학을 가 여성주의 이론을 중심으로 사회정책을 분석하는 공부를 했다. 최근 페미니즘 붐이 일면서 여성의 현실을 세밀하게 표현한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소설이 인기를 끄는데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남성들이 있다면 나처럼 이론서 먼저 보기를 추천한다. 구조를 알면 현실이 보인다.”
글ㆍ사진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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