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어린이집 영어 금지 유예
초등 1, 2 학부모 불안감 토로
“방과 후 영어 기한없이 허용해야”
‘만 1~3세 때는 간단한 미술 활동을, 만 3~5세 때는 피아노·종이접기를, 만 5~12세에는 영어·수학·국어를’
두 살 아들을 둔 최모(28)씨는 태교를 하며 세워놓은 자녀 ‘적기교육’ 계획을 두고 최근 고민이 깊다. 적기교육이란 유아의 성장 단계에 따라 적절한 교육시기가 정해져 있다고 보고 이때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철학. 서두를수록 좋다는 조기교육과는 반대지점에 있다. 정씨 역시 적기교육 관련 책을 읽으며 “아이에게 해가 되는 선행학습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거듭했지만, 영어 노래를 흥얼거리고 영문 메뉴판을 술술 읽는 친구들의 자녀를 볼 때면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최씨는 “맘카페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이 영어 적기가 맞느냐 아니냐에 대해 많은 말이 오가고 있다”고 말했다.
2000년대 중·후반 교육계의 뜨거운 이슈였던 ‘영어 적기교육’ 논쟁이 재점화하고 있다. 교육부가 유치원·어린이집 방과 후 영어 금지 결정을 1년 유예하면서 “적기교육 관점에서 초등학교 3학년 이전에는 영어 교육을 지양한다”는 입장을 재차 강조하면서다. 하지만 ‘왜 하필 3학년인가’ ‘적기교육의 기준은 무엇인가’에 대해선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해 학부모들의 불안은 상당하다.
17일 교육계에 따르면 초등학교 정규 교육과정에 영어가 적용된 것은 1997년이다. 교육부는 당시부터 “외국어 교육 시작점은 모국어가 완성되는 만 9, 10세가 적당하다는 연구결과와 해외 사례 등을 토대로 판단했다”며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를 접할 수 있도록 교과를 배치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발달 특성, 지역 차, 소득 수준 등 교육 환경이 아이들마다 다르기 때문에 교육 적기를 일괄적으로 정할 수는 없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공방이 잇따르면서 정부 차원에서 초등학교 1·2학년에도 영어를 도입하려고 하기도 했다. 교육부(당시 교육인적자원부)는 2006년 전국의 초등학교 50곳을 ‘영어 교육 연구학교’로 지정하고 1·2학년에 영어 수업을 하도록 한 뒤 2년 후 전체 학교로 확대한다는 방침을 내놨다. 당시 “사교육을 받기 어려운 읍·면지역 학부모들의 영어 조기교육 찬성률이 80% 가깝다. 학교에서 조기에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교육격차 해소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현재와 정반대 이유를 제시했다. 하지만 논란 끝에 2008년 3~6학년의 영어 교육 시간을 늘리는 방향으로 갈등을 봉합했다. 3, 4학년은 주당 1시간에서 2시간, 5·6학년은 주당 2시간에서 3시간으로 늘어났다.
적기교육 취지에 공감한 많은 학부모들도 아이를 위해 시도했다가 “한국 교육현실에선 못할 짓”이라며 백기를 들고 있다. 아들을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는 김모(40)씨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사교육을 안 시킬 생각이었는데 주변에서 ‘영어 학원부터 보내야겠다’고 성화여서 ‘우리 애만 뒤처져 내신이나 대학 입시에서 불리해지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의 설득 논리가 분명치 않은 채로 유치원·어린이집의 방과 후 영어 금지 방침이 유예되자 당장 새 학기부터 방과 후 영어를 못하게 된 초등 1·2학년 학부모들도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박인숙 바른정당 의원 등 10명이 “초등 1·2학년 방과 후 영어를 일몰 기한(2월 28일까지) 없이 허용토록 해야 한다”며 지난달 28일 발의한 공교육정상화법 개정안도 다시 힘을 받는 모양새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정부가 적기교육이라는 이상과 경쟁·대입 중심의 교육 현실 사이 괴리를 좁히지 못한다면 같은 논란은 계속 반복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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