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사법-행정의 3권 분립을 정치 이상으로 표방한 최초의 인물이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프랑스 정치사상가 몽테스키외다. 앞선 로크의 권력분립론은 2권 분립, 즉 입법과 행정의 분리였고, 사법은 행정의 일부였다. 몽테스키외는 귀족(의회)의 입법권과 군주의 행정권 사이에 법 집행을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사법권을 놓아, 그 권한을 평민(시민)에게 부여했다. 근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배심원제 재판이었다. 그 분립은, 다른 권력으로부터 간섭 받지 않는다는 의미를 넘어 다른 권력을 견제하고 제약해야 한다는 적극적 의미의 분립이다. 그의 3권분립론과 입헌주의는 한동안은 한 계몽철학자의 생각과 ‘법의 정신’(1748)이라는 책에 담긴 이상에 불과했지만, 법ㆍ제도를 통해 권력 주체로서의 평민을 혁명적으로 부각함으로써 계몽주의 정치철학의 가장 빛나는 횃불이 됐고, 미국과 유럽 민주주의의 다양한 실험들을 촉발시켰다.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는 1689년 1월 18일 프랑스 남부 샤토 드 라 브레드에서 태어났다. 그도 귀족이긴 했지만 장남이 아니어서 작위와 유산을 물려받지 못했다가 27세 때 백부가 사망하면서 작위와 봉토, 직위를 상속받았다. 그렇게 하루 아침에 남작이 되고 보르도 지방법원장이 됐다. 그가 태어나기 1년 전, 명예혁명으로 국왕을 갈아치운 잉글랜드는 ‘권리장전’을 통해 입헌군주제의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그의 조국 프랑스도 절대군주 루이 14세의 사망(1715)으로 훗날 ‘앙시앵 레짐’이라 불리게 될 전제체제에 대한 반감과 저항이 거세지던 때였다. 몽테스키외는 5년 만에 법원장 직을 경매로 처분한 뒤 파리로 이주했고, 영국 등지를 여행하며 현지 정치와 사상을 익혔다. 계몽주의 시대 최고의 정치사상서라 해야 할 그의 역저 ‘법의 정신’은 그런 공부 끝에 20여 년 만에 쓰여진 책이었다.
정치가 삶을 짓누를 때, 속박 당한 채 차별에 신음하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기대를 거는 곳이 법원이고, 사법부다. 몽테스키외가 세습 귀족이나 선출된(혹은 시험으로 뽑혀 국가로부터 안정적인 급료를 받는) 법관이 아닌 평민에게 저 권력을 맡기려 한 까닭은, 어쩌면 스스로도 삼권분립의 지난함을 예감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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