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보고 눈물 흘린 군 내부고발자들
지난달 15일 강원 원주시. 최강혁 총괄 프로듀서 등 영화 ‘1급기밀’ 스태프들은 홍기선 감독의 납골 묘를 찾았다. 홍 감독의 1주기를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는 김영수 전 해군 소령도 함께 했다. 2009년 계룡대 군납 비리를 폭로한 내부고발자로 ‘방산 비리’를 다룬 이 영화에 모티프가 된 인물이다.
홍 감독은 2016년 이날,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1급기밀’ 촬영을 마친 뒤 엿새 뒤에 돌연 숨을 거둬 영화를 세상에 직접 선보이지 못했다. “감독님, 다음 달 영화 개봉합니다.” ‘1급기밀’ 후반 작업을 마친 스태프들은 홍 감독에 영화 개봉 소식을 전했다. 한 달여가 지나 11일 서울 광진구의 한 멀티플렉스 극장. ‘1급기밀’ 첫 언론시사회를 찾은 김 전 해군 소령과 조주형 전 공군 대령은 영화를 함께 보고 눈물을 흘렸다. 조 전 대령은 2002년 차세대 전투기 도입 외압설을 제기했던 내부고발자였다.
“우린 식구”란 말 속 폭력
오는 24일 개봉하는 ‘1급기밀’은 한국군의 고질병처럼 여겨지는 방산 비리를 정면으로 꼬집는다. 1998년 국방부 조달본부 군무원의 전투기 납품 비리 폭로 등 실화를 바탕으로 해 현실감이 생생하다. 적폐청산이 시대적 화두로 떠오른 시기에 개봉을 앞둬 시사점이 크다.
한국 영화 최초로 방산 비리를 다룬 만큼 내용은 강렬하다. 박대익 항공부품과 중령(김상경)은 군 내부 비리로 고심한다. 방송국 여기자 김정숙(김옥빈)의 도움을 얻어 진실을 밝히는 길은 첩첩산중이다. 국방부 고위 관계자들이 “우린 식구”라며 비리에 눈감기를 강요하는 모습은 섬뜩하다. 식구를 등지고 바른 길을 걸으려는 내부고발자에 돌아오는 건 조직의 멸시뿐이다. 영화는 자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관객에 분노를 이끈다. 홍 감독 특유의 묵직함이 빛난다.
홍 감독은 무겁고 어려운 방산 비리란 소재로 왜 대중 영화를 만들려 했을까. 호기심은 2000년대 초ㆍ중반 신문에 실린 박대기 씨의 부고 기사에서 시작됐다. 1998년 외국 무기 부품을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비싸게 사 온 관행을 폭로한 뒤 보복성 인사 조처를 당했고 퇴직해 건강 악화로 숨졌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를 보고 내부고발자의 불행한 삶에 관심을 두게 된 홍 감독은 2009년 MBC 시사고발프로그램 ‘PD수첩’에서 방송된 ‘한 해군 장교의 양심선언 편’을 보고 방산 비리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을 굳혔다. 홍 감독의 ‘1급기밀’ 기획 과정을 지켜 본 최 PD는 17일 “홍 감독이 내부고발자의 사회적 중요성을 영화를 통해 알리고 싶어 했다”며 “전작과 비교해 관객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방법을 더 치열하게 고민했다”고 귀띔했다.
국내 독립영화 1세대의 간판이었던 홍 감독은 약자의 편에서 사회성 짙은 작품을 주로 내놨다. 비전향 장기수의 삶을 다룬 ‘선택’(2003)과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한국인 대학생이 살해된 사건을 조명한 ‘이태원 살인사건’(2009)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홍 감독에 영화는 “고단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매체였다. 그래서 현실을 알리고 기록하는 데 집중했다. 홍 감독이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하는 ‘한국의 켄로치’라 불린 이유였다. 홍 감독은 1980년대 민중독립영화제작단체인 장산곶매 창단 멤버였다. 그는 당시엔 금기였던 5ㆍ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오! 꿈의 나라’(1989)를 만들어 영화계에 입문했다. ‘오! 꿈의 나라’를 연출한 이은 명필름 대표 겸 감독은 홍 감독을 이렇게 기억했다. “참 일관성 있었죠. 돈을 좇지 않고 소신을 지키며 인간성 회복에 대한 희망을 담은 영화를 만든다는 게 시장에선 어려운 일이잖아요.” 이 대표는 홍 감독이 찍은 ‘1급기밀’을 김상범 편집기사와 편집을 함께 해 영화를 완성했다.

“참 바보 같다” 비아냥… 몸값 낮춘 배우들
‘1급기밀’은 세상에 빛을 보기까지 곡절이 많았다. 기획에서 극장 상영까지 무려 8년이 걸렸다. 가장 큰 걸림돌은 투자 받기였다. 홍 감독은 ‘1급기밀’ 제작을 이명박 정부 때 추진하다 번번이 투자 거부를 당했다. 민감한 소재 탓이었다.
홍 감독과 최 PD는 당시 “참 바보 같다” “요즘 돌아가는 상황 몰라? 답답하게”란 말을 영화 관계자들에 수도 없이 들었다. ‘1급기밀’에 필요한 제작비는 25억원. 개인투자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왔고, 김상경 등 주연 배우들이 자진해서 ‘몸값’을 낮춰 영화 제작이 이뤄졌다. 김상경은 “영화 ‘화려한 휴가’ 출연 이후 ‘블랙리스트’에 올랐더라”며 “방산 비리에 많은 분이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출연했다”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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