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ㆍ강인함ㆍ인내심...'남성적' 행동 강요에 속앓이
"궂은 일도 묵묵히 해야" 뿌리 깊은 성역할도 행동 제약
지난해 11월 부산 남구 동명대 중앙도서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5회 간호학과 나이팅게일 선서식'에 참가한 간호학과 4학년 재학생 81명이 촛불을 들고 인류애와 생명존중 등 간호정신 실천을 다짐하고 있다. 전혜원 기자 iamjhw@hankookilbo.com

대학병원 2년차 간호사 최모(28)씨는 지금도 8년 전 ‘선의’의 거짓말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평소 사람을 돕는 직업을 원했던 그는 수능 뒤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에도 수도권 한 대학 간호학과에 원서를 냈고, 나머지 두 곳은 부모님의 뜻대로 기계공학과와 건축학과를 지원했다. 이후 원했던 간호학과에 최초 합격한 최씨는 그 뒤로 두 곳의 공대로부터 추가 합격 전화를 받았지만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최씨는 “간호학과가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극렬히 반대했던 상황이 떠올라 공대 합격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라며 “부모님이 재학 중에도 여러 번 전과를 권하고 지금도 간호사란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할 정도로 편견이 강하지만 업무에 만족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리더십ㆍ강인함ㆍ인내심…. 여성에게 여성다움을 요구하는 불편한 현실 못지 않게 한국사회 남성들도 ‘남자다움’이란 꼬리표에 시달리고 있다. ‘남자답지 못함’으로 취급 받는 행동과 선택들은 이들의 자아실현은 물론 취미와 습관 등 일상생활의 작은 행위까지 제약해 속앓이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남자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행위들은 부담스러움을 안겨준다. 대중매체 속 남성 대부분은 여성을 조수석에 태운 채 능숙하게 운전하며 남자의 운전 능력은 필수적이란 생각을 심어주지만 모든 남성이 운전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직장인 박모(30)씨는 지난 여름 5년 사귄 여자친구에게 제주도 여행을 제안했지만 결국 계획을 접었다. 운전면허가 없던 그는 면허가 있는 여자친구에게 렌터카를 운전할 것을 제안했지만 여자친구는 언짢은 표정으로 “나중에 가자”는 대답과 함께 이번 기회에 면허를 따면 어떻겠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박씨는 “생활권이 서울로 대중교통으로 이동이 쉬운데다 차에 관심도 없어 면허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지만 부모님과 예비 장인어른을 포함해 남자가 운전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수시로 받고 있다”라며 “남녀간 운전 능력에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꼭 남자가 운전해야 하나”라고 말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년 연애 끝에 지난해 8월 결혼에 골인한 장모(32)씨는 결혼 전까지도 묘한 압박감에 시달렸다. 장씨와 여자친구는 집이 각각 서울과 인천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결혼식 두 달 전부터 서울의 신혼집에서 동거했다. 결혼식만 제외하면 신혼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딱 하나 ‘프러포즈’가 빠졌다. 장씨는 “당시 여자친구의 은근한 압박이 지속돼 부랴부랴 결혼식 1주 전 분위기 좋은 식당을 예약해 반지와 함께 정식 프러포즈를 했다”라며 “비용과 노력을 떠나서 서로 결혼을 약속해 사랑이 확인된 상태에서 굳이 남자에게 프러포즈의 의무를 지우는 상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성역할에 대한 기대감은 취향은 물론 일상의 편의를 위한 행동들을 제약한다. 지난해 추석 연휴, 부산 본가에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던 직장인 홍모(39)씨는 화장실을 다녀온 뒤 민망한 상황을 겪었다. 변기에 앉아 소변을 보던 중에 자신의 남동생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것. 갑자기 화장실 문이 열린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동생이 “남자가 자존심 상하게 앉아서 소변을 보냐”며 던진 핀잔이 더 마음에 남았다. 홍씨는 “서서 소변을 보면 변기가 쉽게 더러워져 청소도 번거롭고 아이의 위생에도 좋지 않아 습관을 바꾼 것일 뿐인데 남자의 자존심 까지 말이 나오니 뭐라고 설명해야 할 지 난감했다”고 말했다. 직장인 조모(32)씨는 얼굴이 쉽게 타는 체질이라 BB크림을 발랐는데, 직장에서 “화장하는 남자”라는 조롱을 들어야 했다. 그는 “썬크림을 바르면 얼굴이 하얗게 떠서 여자친구 말을 듣고 BB크림을 사용한 건데 그렇게 놀림감이 돼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라고 토로했다.

궂은 일도 묵묵히 해나가야 한다는 인식도 남성들을 옭아맨다. 경기 성남시의 한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이모(17)군은 지난해 12월 학기말을 맞아 진행된 대청소 때 추위에 떨어야 했다. 남학생은 운동장 등 바깥 청소를, 여학생들은 교실 안을 청소하도록 지시가 내려졌기 때문. 이군은 “청소를 하는데 물리적으로 더 힘이 드는 게 아닌데도 따뜻한 교실 안은 여학생, 밖은 항상 남학생들이 한다”라며 “평소 똑같이 떠들거나 숙제를 하지 않아도 남자에게는 더 험한 말을 하고 체벌까지 하지만 여학생들은 말로 타이르는 경우가 많다”라고 주장했다. 여성가족부의 ‘2016년 양성평등 실태조사’에 따르면 성인 10명 중 4명(40.2%)은 ‘남성은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남자들도 때론 눈물을 훔치고 궂은 일은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의 남성성은 어디서든 앞장서고 누군가를 이겨야 하는 등 가부장적 인식틀 안에서 굳어져 있어 일상의 모든 생활에 스스로 제약을 걸도록 작동하고 있다”라며 “언론 등 대중매체에서 성역할에 대한 변화된 모습을 노출시켜 뿌리깊은 사고방식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조원일 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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