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선택이 세상을 바꾸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1987년 6월 항쟁을 다룬 영화 ‘1987’ 포스터의 중심에 작게 쓰여진 이 문구는 영화의 주제를 관통한다. 31년 전의 민주화 운동은 정치인들의 작품이 아니며,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소임을 다한 평범한 사람들의 드라마라는 것이다. 장준환(48) 감독 역시 “양심의 소리를 내기 위해 피땀을 흘린 분들을 생각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관련기사).
양심을 따르는 것 만으로도 목숨이 위태롭던 엄혹한 시절. 경찰의 물고문 가능성을 증언한 내과의사 오연상(60), 고 박종철씨의 시신을 보존하고 부검할 것을 명령한 최환(74) 전 검사, 사건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교도소 밖으로 끄집어낸 전 교도관 안유(74)ㆍ한재동(71)씨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선택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한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냐?’ 는 말 수없이 들었다” 내과의사 오연상
“그때 사실을 말하지 않고 그냥 얼버무렸다면 거기서 의사를 그만뒀거나 평생 괴로워하며 살았을 거예요.”
31년 전 중앙대 용산병원 내과 전임강사였던 오연상씨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 박종철 열사의 사망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그때 목격한 상황을 다음날 찾아온 기자들에게 알렸다. “바닥에 물이 아주 많았습니다. 욕조도 있었고요. 인공호흡을 하느라 땅에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가운 끝자락이 흙탕물에 다 젖었습니다.” 물고문을 암시하는 그의 말은 ‘심장쇼크사’라는 경찰의 발표와 전혀 달랐다. 사건의 진실을 규명할 첫 단서였던 셈이다.
진실을 말하기까지, 갓 서른을 넘긴 젊은 의사는 밤새워 고민했다. “경찰의 발표가 진실이 아니라는 것만은 내가 분명히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기자들에게 ‘심장쇼크사가 맞다’ 이렇게 얘기할 자신은 없더라고요. 진실을 숨기는 경찰의 모습에 화도 났고요. 그런다고 제가 물고문이라는걸 직접 보진 못한 상황이었으니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이왕 말 할거라면 본 대로 다 얘기하자’였다. 모든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차라리 안전할 것이라는 순진하고도 정직한 발상이었다.
이후 오씨는 꼬박 하루 동안 검찰 조사를 받았다. ‘신길산업’이라 불리던 신길동 대공분실에서도 16시간의 조사가 이어졌다. 다행히 고문은 없었다. 이후 큰 박해도 없었다. 당시 그를 괴롭힌 건 따로 있었다. 영화 속 대학생 ‘연희’의 대사처럼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는 세간의 시선이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냐, 왜 그렇게 잘난 척 하냐, 가족 생각은 안 하냐’ 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병원에서도 제가 말하는 걸 꺼렸죠.” 오씨는 그것이 당시 보통사람들의 태도였다고 말한다. 장기간의 군사 독재에 무력감만 지속되던 나날들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바꾼 결정이었지만 오씨는 그날의 사건을 자녀들에게 얘기하진 않는다. 자랑할만한 기억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의사로선 실패한 거죠. 왕진 갔다 환자를 살려내지 못하고 검안의가 된 셈이니까요. 하지만 의사로서의 양심을 버리지 않고 진실을 말한 것만큼은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깟 대학생 하나’라는 말은 용납할 수 없었다” 검사 최환
1987년 1월 14일 늦은 밤. 서울중앙지검 최환 공안부장의 사무실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경찰들은 다짜고짜 ‘빨리 좀 처리해 달라’는 말을 했다. 조사받던 학생이 심장쇼크사로 사망했는데, 부모가 오늘 안에 화장하길 원한다는 얘기였다. 최 검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경찰을 추궁하던 2시간 동안 전화통에 불이 났다. 고문이 있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최 검사는 ‘내일 얘기하자’며 경찰을 돌려보냈다.
그의 태도는 경찰로선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당시 경찰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은 공안검찰과 늘 함께 일해온 사이였다. 더욱이 약 1년 전 고 김근태 전 의원 고문사건 당시 변호인들이 ‘고문기술자’ 이근안 등 경찰관 8명을 고발했지만 검찰은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우리편이니 넘어가주겠지’라는 생각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그들은 최 검사의 마음 속은 들여다보지 못했다. “아침에 지검으로 출근하다 보면 매번 소복입고 오열하는 분들을 마주쳤어요. 왜 우리 아들 우리 오빠 고문하냐고 항의하는 소리가 무지하게 많았죠. 그 때마다 내가 공안부장을 얼마나 할 지 모르겠지만 고문시비는 없애고 나가겠다고 다짐했었죠.”
다음날 새벽 출근한 최 검사는 부검을 지시했다. 밤새 동생 집에 피신했던 그는 자택에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왔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고문을 확신했다. 영화 속에서처럼 경찰은 강경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밤길 조심하라’는 협박도 했다. 그럴수록 최 검사는 품에 사표를 품은 채 더 철저하게 달려들었다.
영화 속 박처원 치안감(김윤석 분)의 대사, ‘그깟 보따리 하나 터진 것 갖고 웬 난리냐’와 같은 말도 지겹게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깟 대학생 하나 죽은 것 갖고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어도 되겠냐’ 라는 말이 제일 싫었어요. 당시 정권의 수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믿었다. 부검을 해서 진실이 밝혀지면 자신 역시 당당할 수 있으리라. “박종철 군의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혼신을 다한 건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내가 먼저 떠난 그의 영혼을 만나도 웃으며 인사 할 수 있겠죠.”
‘정권의 개’ 노릇하던 교도관들이 민주화 앞당기다. 안유ㆍ한재동 교도관
1987년 2월 19일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 즉 공안관련사범 전담반장이었던 안유는 불편한 면회를 참관하고 있었다. 한 달 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던 대학생 사건에 책임을 지고 들어온 경찰 조한경과 강진규. 동료 경찰들은 그들을 매일같이 찾아와 ‘특별면회’를 했다. 그들은 참관조차 막으려 했지만 법무부의 조정 덕에 겨우 참관만 하고 기록도 못하던 상황이었다.
그날 찾아온 대공5과장과 경찰들은 늘 그렇듯 두 사람을 회유하려 했다. ‘재판은 빨리 받도록 해주겠다’, ‘내년이면 특별사면으로 풀려날 거다.’ 이 말에 조한경은 격분했다. 고문에 가담했던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의 이름을 말하며 반발했다. 안 계장은 손을 떨며 업무일지에 이름을 적었다. 쪽지의 내용은 당시 교도소에 있던 이부영 전 의원에게 전해졌고, 당시 영등포교도소 철공담당 한재동과 전직 교도관 전병용씨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안유ㆍ한재동 두 전직 교도관이 하나의 사건을 완성했다. 그러나 둘의 성격은 정 반대다. 한씨는 이전부터 독재정권에 반발하는 양심수를 위해 ‘비둘기’ 역할을 해왔다. “공무원은 정권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라고 생각했고요.” 그는 고문당한 채 교도소에 들어온 학생들을 많이 봤기에 쇼크사라는 정부의 발표도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반면 안씨는 공무원으로서 자신의 직분에만 충실한 소시민이었다. 특히 민주화운동을 하던 학생사범을 가혹하게 대했다. 그것이 공안담당인 자신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나를 ‘전두환의 개’라고 하면서 오물을 던지기도 했는데 솔직히 할 말이 없어요. 나는 그때 교도소 질서를 잡는 책임자였고 계구를 써가며 학생들을 진압했습니다.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자신이 비둘기였음을 당당히 밝혔던 한씨와 달리 안씨는 박종철 열사 25주기인 2012년에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해자의 편이었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자신이 결코 ‘의인’은 아니라고 말한다. 안씨는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한 덕에 역설적으로 중요 정보를 알 수 있었지만 공안담당 교도관으로서 해온 일이 여전히 부끄럽다”며 “그저 사회에 작은 기여를 했다는 보람만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한씨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지만 이한열ㆍ강경대 등 학생들의 안타까운 희생이 이어져, 한편으론 그게 아쉬웠습니다”라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박고은 PD ssolly@hankookilbo.com
한설이 PD rhdm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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