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프랑스 식민지 때 들어와
세계 5분의 1 생산 ‘국민 음료’로
맛과 향보단 분위기 즐기는 문화
전문점 많아지며 변화 바람 솔솔
연유 넣은 진한 커피 여전히 인기
옥수수 태운 가짜도 싼 맛에 마셔
길거리 카페에 사람들이 커피 한잔 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하는 모습은 베트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과거 프랑스 식민지 영향으로 여유를 즐기는 문화가 있다고 하는 이들도 있고, 일정 시간 일하고 나면 쉬어야 하는 열대 지역 특성이 반영됐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그 이유야 어쨌든 베트남 사람들의 일상 속에 ‘커피’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19세기 프랑스 식민지 당시 가톨릭 사제가 먹기 위해 가져온 데서 시작된 베트남의 커피 문화는 중서부 고원 지대를 중심으로 경작지가 확대되면서 더욱 번성하게 됐다. 2016년 말 현재 제주도(1,850㎢) 3.5배 면적(6,450㎢)에서 세계 커피의 5분의 1(약 160만톤)이 생산된다. 귀족, 도시인의 먹거리에서 국민 음료로 자리잡은 배경이다. 현지인들처럼 길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일은 여행객들이 반드시 경험해야 할 일로 꼽힌다.
심심한 커피는 가라
베트남에서 커피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달고 진한 맛’을 첫인상으로 꼽는다. 에스프레소 샷에 얼음과 단맛의 농축연유를 섞어 만든, 가장 대중적인 ‘카페 쓰어 다(Ca Phe Sua Da)’의 맛으로, 쓴 맛이 강한 로부스타 종으로 만들어진다. 한국인들이 즐기는 ‘아메리카노’ 종류의 커피를 마시는 베트남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베트남 커피 경작지 면적의 90% 이상을 로부스타 종이 덮고 있기 때문이다.
농축연유뿐만 아니라 로부스타의 쓴 맛을 중화시키기 위해 달걀, 요거트, 아보카도, 코코넛, 옥수수, 대두, 버터 등 다양한 부자재들이 동원된다. 현지 커피전문점 푹 롱(Phuc Long)의 한 관계자는 “쓴맛을 누르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보다 더 다양한 맛을 즐기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커피 본래의 향과 맛에 대한 베트남 사람들의 낮은 인식 수준 영향도 있다. 바리스타 반 판 흥(25)씨는 “길에서든 전문점에서든 앉은 자리에서 분위기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수가 아직은 절대적으로 많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가짜 커피’가 횡행한다. 호찌민시 인문사회과학대 소속의 한 학생은 “학교 근처에서 지나치게 싼 가격의 커피를 마실 때에는 가짜라는 생각을 한다”면서도 “싼 맛에 그냥 마시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실제 옥수수를 태우다시피 볶아 만든 ‘커피’에 미량의 진짜 커피를 탄 인공커피는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의 단골 메뉴다. 톱밥 등으로 만든 뒤 인공 색소와 향료로 만든 가짜 커피도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현지 일간 띠엔 퐁(Tien Phong)에 따르면 가짜 액상 커피 1㎏(35만동ㆍ약 1만7,500원)으로 2만잔의 커피를 만들 수 있다.
앉아서, 밖에서
커피를 소비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길거리 카페(카페 벳)에서 먹느냐, 커피전문점에서 먹느냐. 하지만 비가 내리거나 아주 더운 날이 아니면 흡연까지 쉽게 할 수 있는 실외에서 앉아 마시는 것을 선호한다. 걸어 다니면서 먹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며 아무리 바빠도 앉아 마신다. 토종 브랜드 파시오(Passio) 커피는 당초 테이크아웃 전문점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매장 면적을 넓히고 테이블과 의자를 추가로 놔야 했을 정도다. 해먹에 몸을 맡긴 뒤 커피와 낮잠을 즐기는 카페도 인기다.
특히 휴일 오전 정원을 낀 카페(San Vuon)에는 가족 단위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좁은 집에서 벗어나 가족이 한데 어울리기 위한 것이지만, 이곳에서 아침과 점심을 겸한 식사가 이뤄지는 경우도 많다. 10대 학생들이나 여성들의 경우 카페인 양을 절반으로 줄인 박 씨우(Bac Xiu) 커피를 즐긴다.
가격은 천차만별. 카페 쓰어 다 기준, 가판대 커피는 1만동(약 500원)에서 시작한다. 여기에 얼음이 추가되면 20% 가량 비싸다. 실내에서 먹을 수 있는 커피 전문점의 커피는 3만동 안팎 수준이지만, 스타벅스 등 해외 브랜드 매장에서 마실 경우 배로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현지 광고회사에서 근무하는 크리이에터 안 뚜(35)씨는 “웬만한 직장인 세끼 식사비에 해당하는 가격의 커피”라며 “스타벅스에는 특별한 날에만 간다”고 말했다. 인지도가 높은 스타벅스의 주고객은 외국인들이다.
진짜 향과 맛을 찾아서
맛과 향보다는 분위기를 쫓는 베트남 사람들의 커피 소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1990년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길거리에 커피를 소비했다면, 2000년대 들어 북 카페, 인터넷 카페 등 다양한 테마의 커피전문점들이 생겨났다. 최근에는 커피 본래의 향과 맛을 소비하려는 소비자들도 늘고 있다.
외국인들의 유입이 늘면서, 또 해외 유학파들이 베트남으로 돌아와 커피 스타트업에 뛰어 들면서 이전과는 사뭇 다른, 서울 한복판에 내놔도 손색 없을 정도의 수준을 갖춘 커피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에 질세라 2013년 비교적 베트남에 늦게 진출한 스타벅스는 최근 고급 매장 ‘스타벅스 리저브’까지 열었다.
베트남 커피 산업의 메카로 부상하고 있는 고원 도시 달랏에 본사를 둔 ‘메리드 빈(The Married Beans)’의 푸엉 투이씨는 “수익을 올리기 위해 유기농법으로 재배하는 농가가 늘고 있고, 이를 활용한 고급 커피 브랜드들이 몸집을 키우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며 “베트남 사람들의 커피 취향도 머지 않아 크게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호찌민ㆍ달랏=글ㆍ사진 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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