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환(48) 감독은 인터뷰 도중 자주 목이 메었다. 애써 참은 눈물이 기어이 틈새를 비집고 새어 나오기도 했다. ‘열사’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그 두 글자만 만나면 차분하게 흘러가던 이야기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멋쩍은 웃음이 뒤따라와 먹먹한 가슴을 감췄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장 감독은 “양심의 소리를 내기 위해 피땀을 흘린 분들을 생각하면서 영화 ‘1987’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박종철부터 이한열까지 1987년의 민주화 열망이 장 감독의 밀도 있는 연출로 되살아나 그 뜨거움을 오롯하게 품은 채 30년의 세월을 건너왔다. 지난 7일 400만 고지를 넘은 ‘1987’은 500만 관객을 향해 묵묵히 전진하고 있다. 속도는 더디지만 허수가 없는 숫자다. 문재인 대통령도 그 숫자에 한 자리를 채웠다.
영화는 지난 정부 시절 비밀리에 기획됐다. 실제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장 감독을 움직인 건 “부채의식”이었다. 89학번으로 대학 시절을 보내면서 “사회에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줄곧 마음이 무거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부채의식은 “다음 세대에는 더 나은 세상을 물려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돼 영화로 이어졌다.
다행히 영화가 준비되는 동안 세상이 뒤집혔다. 촛불이 광장을 밝혔고, 대통령이 탄핵됐다. 유명 배우들은 작은 역할이라도 맡겨 달라며 앞다퉈 출연을 자청했다. 지난해 4월 마침내 촬영이 시작됐다. “하늘이 보살펴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한두 번 했던 게 아닙니다. 매 순간이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흐린 날씨가 필요한 촬영이면 날씨가 흐렸고, 전국에 호우주의보가 내린 날에도 ‘1987’ 촬영지에만 비가 안 왔다. 명동성당은 처음으로 내부 촬영을 허락했다. 남영동 대공분실 외관도 담을 수 있었다. 장 감독은 더 특별한 순간을 떠올렸다. “박종철 열사 장례 장면을 촬영하던 날이었어요. 얼음이 언 강물 위로 뿌려진 유해가 바람에 날려야 하는데 갑자기 눈이 내리더라고요. 눈발에 유해가 잘 안 보이면 어쩌나.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했죠. 나중에 컴퓨터그래픽(CG) 스태프가 그러더군요. 그 눈은 몇억원짜리 미술이라고. 하늘에서 눈을 내려 준 거라고.”
촬영 팀은 열사와 관련된 장면을 찍을 때마다 묵념을 올렸다. 장 감독은 “이 영화를 왜 만드는지 스스로 다잡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 진심을 유가족이 더 고마워했다. 그래서 촬영장을 방문해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유품을 촬영에 빌려 주기도 했다. “그 시대를 살아온 분들, 특히 유가족의 마음을 어떻게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요. 촬영장을 방문하신 이한열 열사 어머니가 김태리(연희 역)의 손을 꼭 잡으면서 ‘우리 아들도 이런 여자친구가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하시는데 마음 아팠습니다.” 장 감독의 눈가가 또 젖어 들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용기가 릴레이처럼 이어지는 형식은 ‘우리 모두가 역사의 주인’이라는 메시지를 품는다. 직선제를 쟁취하고도 군사정권을 종식시키지 못한 미완의 혁명에 대한 평가는 잠시 미뤘다. ‘악의 축’인 대공수사처 박 처장(김윤석)의 매서운 눈빛이 당시 권력자의 사진에 비쳐 어른거리는 장면에 이미지로 담았다. 장 감독은 “착한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온 국민이 폭력적인 정권에 맞선 과정의 아름다움을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선 이야기라도 꺼내 보자는 생각이었어요.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우리 모습에서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길 바랐습니다. 그리고 광장의 외침과 열사들의 희생이 있었는데도, 우리가 왜 30년 전처럼 광장으로 나서야 했는지, 우리의 삶은 왜 이렇게 팍팍하고 쓸쓸한지 돌아보는 계기로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다면 정말 큰 보람이겠다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장 감독에게 가슴에 맴도는 대사를 꺼내 달라 부탁했다. 극 중 이한열 열사의 대사가 읊어졌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고 묻는 연희에게 ‘나도 가족을 생각하면 그만두고 싶지만 마음이 아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고 답하는 장면이었다. “마음이 아파서 저도 용기를 냈습니다. 이 대사가 우리 모두에게 큰 힘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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