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어떻게 하는 건가요? 저는 완전히 취조 받을 생각하고 왔거든요.”
불경을 낭독하듯 법률용어를 줄줄 외던 ‘고박사’는 온데간데 없었다. 죄수복 대신 말끔한 수트 차림으로 나타난 배우 정민성(43)도 자신의 복장이 어색한 지 멋쩍게 웃어 보였다. 방영 중인 tvN 수목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감빵생활’)로 정민성의 인생에도 볕이 들기 시작했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 쇄도에 얼떨떨한 기색이다. 영화 ‘박하사탕’(2000)으로 데뷔한 이래 언론사 인터뷰는 처음이라는 그를 8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만났다.
삼수, 직장생활 그리고 서른 배우 시작
“고박사님!” 정민성은 최근 여섯 살 둘째 아들을 데리고 동네 마트를 갔다가 깜짝 놀랐다. ‘감빵생활’의 배역 이름을 크게 부르며 반가워 해주는 팬을 만났다. 그 모습을 아들이 “너무 뿌듯하게 바라보며 웃었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서는 아홉 살 형에게 조목조목 얘기해 주더란다. ‘감빵생활’이 그에게 무명배우라는 꼬리표를 떼어준 듯했다.
이제 막 유명해진 그는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늦깎이 배우다. 중학교 시절 학교 선배들의 연극 ‘방황하는 별들’을 보며 배우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생겼다. 그 마음이 현실과 맞닥뜨린 게 삼수시절이다. 서울예술대 연극과에 입학해 꿈에 그리던 무대에 서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 졸업만 하면 배우가 될 줄 알았다. 그러나 1997년 IMF사태가 터지면서 먹고 사는 일이 더 중요했다. 취업 난을 겪던 그는 마침 한 친구가 벤처회사를 차리자 컴퓨터프로그래머로 취직을 했다. 그렇게 4~5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하지만 타고난 배우 기질이 어디 가랴. 서른 즈음이 되자 숨겨두었던 발톱이 바깥으로 드러났다. “돈을 못 벌어도 연기가 하고 싶었다.”
그러다 김혜수 주연 영화 ‘얼굴 없는 미녀’(2004)의 제작사를 무작정 찾아갔다. 오디션 받을 기회조차 없으니 조감독에게 매달렸다. “어깨만 (화면에) 걸려도 되니까 출연시켜 달라”며 사정했다. 정말 어깨만 걸칠 정도의 역할인 수술실 의사로 출연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영화 ‘내 머리 속에 지우개’(2004)에선 목소리만 나왔다. 주인공 수진(손예진)의 잃어버린 휴대폰을 찾아주는 ‘전화 받는 행인’ 역이다. 지금 들어도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과 차분한 음성은 ‘고박사’ 그 자체다.
정민성은 청량한 목소리와 강한 인상 덕분인지 유독 기자와 형사 역할을 많이 했다. 영화 ‘꾼’(2017)과 ‘내부자들’(2015), ‘소원’(2013), ‘국가대표’(2009) 등 6개 작품에서 기자 연기를 했다. “최 기자만 세 번했다”고. 영화 ‘아저씨’(2010), ‘황해’(2010), ‘신세계’(2013) 등에서 형사 역만 10번 넘게 했다. 70여 편의 출연 영화에서 단역을 한 횟수가 더 많지만 1년에 10편 이상 영화를 촬영한 적도 있었다. “갑자기 내가 너무 소진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물론 저를 아시는 분이 없었지만요(웃음). 2014년부터 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다 ‘감빵생활’에서 연락이 왔고,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로 유명한) 신원호 PD의 이름을 들었을 때 로또라고 생각했어요.”
“노래 못해 고박사 역 무산될까 걱정도”
“혹시 노래 좀 하세요?” ‘감빵생활’의 고박사 역으로 캐스팅 되고 얼마 안 돼 신 PD에게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노래를 잘 하느냐는 질문에 “제가 노래는 못하는데요. 노래를 잘해야 하는 건가요?”라고 반문하며 불안감이 밀려왔다. 노래를 못해 ‘캐스팅이 무산되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출연 계약서를 쓰고도 안심이 안 됐다. 당장 노래방에 달려갔다. 한 달 동안 연습했다. 고박사가 노래대회에 나가서 부른 프랭크 시나트라의 곡 ‘마이웨이’였다. 그는 “실제로는 드라마에서 나온 실력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촬영할 때도 “제발 박자 좀 맞춰달라”고 신 PD가 간곡히 부탁했다. 신 PD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마이웨이’ 장면을 위해 거의 하루종일 촬영했다. 문래동 카이스트를 연기하는 박호산이 보다 못해 나섰다. 카메라 옆에서 손으로 박자를 맞추면서 정민성을 도왔다. 어렵사리 촬영을 마쳤을 때 신 PD가 안도하며 말한 “큰 산 하나 넘었네요”가 지금도 귓가를 맴돈다.
정민성은 3차 오디션까지 보며 ‘감빵생활’에 캐스팅 됐다. 1차 오디션을 보고 두 달 동안 연락이 없어 “떨어졌구나” 했다. 마음을 달래려 가족들과 필리핀으로 여행까지 갔었다. 여행하다 2차 오디션 참가 연락을 받았고, 3차 오디션에선 “같이 하시죠”라는 말에 귀를 의심했다.
4개월간 김제혁(박해수), 해롱이(이규형), 장기수(최무성), 문래동 카이스트 등 감방 식구들과 동고동락했다. 8회 대본에서 갑자기 고박사가 아프기 시작하는 걸 보곤 “덜컥 겁이 났다”. 10회에서 이감하는 설정이라 “이제 빠지는구나” 했단다. 마지막 촬영 때에는 박호산이 고급 양주를 선물로 주고, 박해수가 손편지로 마음을 달래줬다. 하지만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완전히 실연당한 느낌”이다. 지난 몇 주간 먹먹한 채 지냈다. 그래도 아이들을 돌보며 다시 아빠의 자리로 돌아갔다. “지금은 ‘본방사수’ 하며 ‘감빵생활’을 꼭 챙겨봅니다. 고박사 연기 하면서 어려운 법률용어 대사를 외웠던 게 가장 기억에 남네요. 저처럼 무명 배우에게 기회를 준 ‘감빵생활’ 같은 드라마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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