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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손목인 (1월 9일)

입력
2018.01.09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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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살이'의 작곡가 손목인이 1999년 오늘 별세했다. 자료사진
'타향살이'의 작곡가 손목인이 1999년 오늘 별세했다. 자료사진

고복수 노래 ‘타향살이’(1934)의 작곡가 손목인(孫牧人)이 1999년 1월 9일 85세의 일기를 마쳤다. 본명은 득렬(得烈), 예명으로 임원(林園) 등을 썼다.

그는 1913년 경남 진주의 한의원 집안에서 태어나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고,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와 중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도쿄 고등음악학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일본 유학 시절 걸출한 음악인이자 연예사업가로 ‘오케레코드’를 설립한 이철(李哲, 1903~1944)을 만나 대중음악 작곡가로 데뷔했다. 데뷔작’이 ‘타향살이’였다. 가사는 연희전문 출신의 작사가로 아동문학과 민속음악 운동가로도 활동했던 김능인(1911~1937)이 썼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손꼽아 헤어보니/고향 떠난 십여 년에/청춘만 늙어//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밖을 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 봄도 푸르련만/ 버들피리 꺾어 불던 그 때는 옛날”

느리고 구슬픈 단조 가락의 ‘타향살이’는 일제 치하의 서민들과 상해ㆍ만주의 독립운동가들, 징용 징병 일본군 성노예로 고향을 잃은 이들의 애환을 달래고, 해방 후 한국전쟁과 60ㆍ70년대 집 떠난 ‘산업 역군’들의 마음을 보듬어 준 상징적 노래로, 고복수 외에도 배호, 이미자 등 기라성 같은 가수들이 따라 불렀다.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로 시작하는 고복수의 1937년 히트곡 ‘짝사랑’도 손목인-김능인의 작품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애창곡이었다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1935)도 손목인 작품. 가사는 오케레코드의 노랫말 공모에 와세다대 출신 20대 무명 시인 문일석이 낸 당선작이었다. 저 사랑의 에토스가 특별히 사무치는 것은 물론 조선 6대 도시이자 목면 수출항이던 목포라는 항구의 토포스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해방 후 ‘아내의 노래’ ‘슈샤인 보이’ ‘카스바의 여인’등 1,000여 곡의 가요를 작곡했고, 50여 편의 뮤지컬과 70여 편의 영화 음악을 남겼다. 중일전쟁 이후 만들어진 ‘봄날의 화신’같은 친일 노래도 포함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고, 그 탓에 그 흔한 기념물도 기념행사도 없다.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대상에 대한 순도ㆍ결백의 강박이 과분한 영웅을 만들고 과도한 배제를 강요한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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