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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이봉창 의거 (1월8일)

입력
2018.01.08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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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이 1932년 1월 8일 일본 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했다.
이봉창이 1932년 1월 8일 일본 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했다.

이봉창(1900~1932)이 1932년 1월 8일 일본 히로히토 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했다. 천황 일행이 관병식을 참관한 뒤 황궁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호위 무관 두 명이 다치고 마차가 손상됐지만 천황은 무사했고, 이봉창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는 그 해 9월 30일 도쿄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열흘 뒤인 10월 10일 교수형 당했다. 향년 32세.

그는 건축업자의 아들로 경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딴살림을 차리고 사업마저 어려워져 그는 소학교만 마치고 진학을 포기한다. 10대 중반부터 일본인의 과자가게 등에서 점원 일을 하다 18세에 철도청 용산철도국 기차운전 견습생이 됐지만 1년 남짓 만에 그만뒀다. 급료와 승진에서 일본인에게 차별 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고 그는 훗날 재판에서 진술했다. 19세 때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났지만, 그는 관심도 없었다고 했다.

이봉창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건 25세 때. 철도청에서 알게 된 일인이 조선인 식모를 구하자 그에게 조카를 소개한 뒤, 급료를 가불 받아 배표를 샀다. 일본서 그는 기노시타 쇼죠(木下昌藏)라 불리며 일인처럼 행동하려 노력하며, 가스회사, 부두 인부로 일했다. 28년 히로히토 천황 즉위식에 구경갔다가 검문에 걸려 열흘 남짓 구류를 살았는데, 조선에서 온 한글 편지가 발각된 까닭이었다. 그는 이후 오해가 두려워 친지와의 편지 내왕도 끊었다. 29년에는 오사카에서 가게 점원으로 일하다 수금한 돈 100원을 들고 도주하기도 했고, 외판사원으로 일하다 판매금을 탕진해 그만두기도 했다 한다.

31년 1월 상하이로 넘어가 철공소 등에서 일했지만 자주 결근하며 마음을 두지 못했다고 한다. 우연히 임시정부 사람들을 알게 되지만 처음에는 밀정이나 부랑자쯤으로 홀대 당했다. 그러다 김구의 눈에 들어 ‘한인애국단’ 1호 단원이 됐고, 그 해 말 공작금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저 사건을 결행했다. 그의 삶이 급선회한 데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공판 기록에는 그가 옥중에서 불교서적에 감화돼 “천황폐하에 대해 난폭한 짓”을 한 것을 후회하고 “부추김에 놀아난 어리석음을 원망”했다고 적혀 있다. 김구는 그에게 자신의 본명을 알려주지 않았고, 그는 자신을 ‘부추긴’ 이가 김구라는 걸 일본 경찰을 통해 알았다.

김구의 임시정부는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1932년 5월) 등으로 존재감을 부각하며 회생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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