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에 일자리 알아보지 그래?”
1998년, 김승곤 애비뉴8번가 회장은 건설 사업을 접고 다시 직장생활을 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사업 시작 후 5년만에 밀어닥친 IMF의 파고를 넘긴 했지만 자본금이 바닥이었다. 10년 동안 회사생활을 해서 번 돈 2억이 모두 날아간 셈이었다.
친구 두 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행히 주머니를 털어 투자를 해줬다. 두 사람 모두 한결같이 “IMF에도 용케 살아남은 걸 보면 사업 수완이 좋은 것 같다. 반드시 크게 일어설 것”이라고 했다. 그들의 말마따나 김회장은 IMF가 터졌을 때 살아남는 게 관건이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부도가 나면 재기가 힘들 거라고 판단으로 경산에 지어놓은 빌라 16세대를 거의 헐값에 넘겼다. 그 자금으로 부도를 피했다. 주머니에 돈은 없었지만 절반의 성공은 성취한 것이었다.
힘든 시간을 견디고 나자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지역의 대형 건설업체를 비롯해 수많은 하청 업체들이 도산을 하는 바람에 집을 지을 회사가 없었다. 지었다 하면 바로 분양이 됐다. 그때부터 차근 차근 다시 일어섰다.
“김대중 대통령까지는 경기가 좋았습니다. 2005년 무렵부터 다시 힘들어졌습니다. 뭔가 돌파구나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IMF가 위기를 돌파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건설 경기가 비교적 괜찮은 지역을 물색해보니 울산이 좋아 보였다. 직원들을 비롯해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텃새 때문에 힘들 거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그 자리에 주저앉느니 쓰러질 때 쓰러지더라도 일단 시도는 해보자”는 생각으로 울산행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울산에서 ‘촛대뼈’가 떨리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텃새가 정말 장난이 아니더군요. 아는 사람도 없어서 어디 하소연 할 때도 없고, 막막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레미콘 계약이었다. 보통 공사를 끝내고 대금을 지불하지만 울산에서 선금을 달라고 했다. “뭘 믿고 돈도 안 받고 타지에서 온 사람의 공사를 해주느냐”는 것이었다. 요구대로 선금을 지불했다.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일단은 들어주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속이지 말자고 결심했습니다. 신뢰와 진심이 통하면 반드시 동업자로 받아줄 거란 확신이 있었습니다.”
첫 공사에 성공하고 나자 다음부터는 선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 뒤부터 고향에서나 다름없는 여건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울산에서 나름의 텃새 극복법을 터득한 것이었다.
울산에서 3년 정도 일을 하고 난 후 안동으로 갔다. 그 즈음 안동 신도청 이전이 발표됐다. 객지 공사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안동에서도 텃새가 있었지만, 울산에서 이미 겪었던 일이라 수월하게 난관을 이겨나갔다. 옥동에서 빌라 87세대를 지어 모두 분양했다. 이제는 안동이 제2의 고향이 됐다.
안동에서 성공한 후 2013년 영주시로 내려가 공사를 시작했고, 영주에 이어 경산으로 내려왔다. 원주 핵심도시에서는 상가 건축에 도전했다. 상가도 멋지게 성공시킨 후 경기도 김포에 진출해 점포 30개 정도를 지어 분양에 성공했다. 현재는 수원에서 상가 공사 중이다.
2017년 대구 동성로에 있는 십만석꾼인 석재 서병오 선생의 생가 터에 애비뉴8번가를 준공했다. 김 회장에게 애비뉴8번가는 단순한 상가 건축물 이상이다. 필생의 역작이다.
“동성로를 시작으로 전국에 애비뉴8번가를 보급할 계획입니다. 전국 곳곳에 예술과 먹거리를 융합한 애비뉴8번가를 만들어 관광 중심지로 만들 생각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물론이고 외국 관광객들도 그 지역의 애비뉴8번가를 한번쯤 들러봐야 제대로 관광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이제 시작이지만 마음은 벌써 추수를 앞둔 만석꾼처럼 넉넉하다.
“IMF를 시작으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다양한 환경에서 말 그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습니다.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끝없이 애쓰고 노력하면서 난관을 극복해온 세월과 경험 자체가 저에겐 가장 큰 자산입니다. 애비뉴8번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희망의 열매를 얻고 싶습니다. 그럴 자신 있습니다. 지켜봐주십시오!”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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