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잠만 잤다. 굉장히 즐겁고 잉여롭다.” 어느 배우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여기에선 ‘잉여롭다’가 특별히 눈에 띄는데, 이 새말은 문맥상 ‘여유롭다’로 읽힌다. 그런데 ‘쓰고 난 나머지’란 뜻의 ‘잉여(剩餘)’가 ‘그것의 속성이 충분히 있음’의 뜻을 더하는 ‘-롭다’와 어울리는 건 어색하다. ‘명예롭다, 슬기롭다, 평화롭다, 새롭다...’ 등을 보면 어색함의 이유가 어느 정도 짐작된다. 그렇다면 ‘잉여롭다’란 표현은 ‘여유’와 ‘잉여’를 혼동한 결과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러주는 데는 없고 집에서 게임이나 하면서 잉여롭게 지낸다”라는 한 청년의 말에 나온 ‘잉여롭다’는 ‘여유로움’이 아닌 ‘막막함’으로 읽힌다. 그 말엔 스스로를 ‘잉여인간’, 즉 ‘세상에 꼭 필요하지 않은 남아도는 사람’으로 보는 자괴감이 담겼다. “너 아니어도 이 일을 할 사람은 많다”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들에겐 ‘여유’가 곧 ‘소외’와 ‘배제’일 수도 있을 터. 이처럼 언어의 질서와 현실의 삶이 괴리될 때 문법을 거스른 새말이 출현한다. 장덕진 교수의 칼럼에서 ‘잉여롭다’의 출현 맥락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지금의 20~30대에게 ‘잉여’는 정체성의 자연스런 한 부분이다. (중략) 우리가 만들어놓은 세상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아도는 그들에게, 한가로운 것과 일하고 싶어도 아무도 시켜주지 않는 조바심 사이의 경계선은 촘촘하다. 그래서 그들은 한없이 ‘잉여롭다’.”(한겨레, 2012.06.24.)
곧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가 도래한다고 한다. 새해엔 우리들 모두 그 소득을 체감할 수 있기를, 그래서 ‘잉여롭다’의 쓰임이 잦아들고 ‘여유롭다’의 쓰임이 더 많아지길…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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