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 와그너 대표 선발전 출전
갈고 닦은 ‘라라랜드’ 버리고
전성기시절 ‘물랭루주’ 선곡
변화 대신 익숙함으로 승부수
12년 올림픽 메달 갈증 풀지 관심
1990년대 미국 여자 피겨스케이팅은 황금기였다. 크리스티 야마구치(1992년 알베르빌 금), 타라 리핀스키 (1998년 나가노 금), 사라 휴즈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금), 세계 피겨스케이팅대회 5회 우승에 빛나는 미셸 콴, 각종 월드컵을 휩쓸었던 ‘비운의 스타’ 낸시 캐리건과 ‘은반 위의 악녀’ 토냐 하딩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주름잡았다. ‘동계올림픽의 꽃’으로 불리는 여자 피겨는 미국을 위한 종목 같았다.
여자 피겨 세계 최고 자리를 양보할 것 같지 않았던 미국이건만 이후 조금씩 위축되더니 지난 10여 년 간 극심한 메달 가뭄을 겪고 있다.
이번에 미국의 여자 피겨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나선 선수는 애슐리 와그너(26)다. 김연아와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20대 중반의 ‘노장’인 그가 비장한 각오로 평창동계올림픽에 도전한다. 2012년과 2013년, 2015년 미국선수권대회를 제패하고, 2012년 4대륙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의 베테랑이다. 그가 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겸한 미국피겨선수권대회(3~7일)에 출사표를 던졌다.
와그너는 특히 프리 종목에서 자신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프로그램 ‘물랭루주’를 다시 들고나오는 강수를 뒀다. 변화를 위해 최근까지 갈고 닦았던 ‘라라랜드’를 버리고, 보장된 익숙함을 택한 것이다. 와그너는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에 “(프로그램을 갑자기 바꾼 것은) 내가 내린 결정 중 가장 냉정하고 단호한 결정이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현재 여자 선수들 가운데 가장 기복 없는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시즌 내내 발목 부상으로 ‘한풀 꺾였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그랑프리 6차 대회에서는 “밋밋한 연기”라는 혹평을 받았다. 특히 2015년에 첫선을 보였던 ‘물랭루주’가 3 시즌이 지난 지금 다시 한번 관객과 심판에게 어필할 지도 미지수다.
이밖에 대표팀에 합류할 것으로 예상되는 그레이시 골드(23)는 우울증과 식이장애 치료를 위해 이번 시즌을 쉬고 있고, 미라이 나가수(25) 역시 두드러지는 활약이 없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평창에서도 미국 선수가 피겨 여자 싱글에서 메달을 딸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라고 진단했다.
‘명가의 몰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온다. 리핀스키는 “피겨는 예술성과 기술성이 동시에 강조되는 종목”이라며 ”최근 채점 방식은 기술ㆍ점프가 연기력보다 중요해졌다”라고 진단했다. 미국은 그간 기술보다는 연기력과 표현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옛 채점방식에 최적화된 훈련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신인 선수 발굴 과정에도 문제점이 제기된다. NYT는 “어렸을 때부터 고난도 점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러시아식’ 기술 집중 훈련이 예브게니아 메드베데바(19) 같은 선수를 키워냈다”라고 지적했다. 미셸 콴(38) 등 불세출의 스타들이 매년 당연하듯 따오는 우승컵에 너무 안주했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 여자 피겨스케이팅은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에서 사라 휴즈(32)가 금메달(미셸 콴은 동메달)을 목에 건 게 동계올림픽의 마지막 금메달이다. 4년 후인 2006년 키미 마이스너(29)가 캘거리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깜짝 우승’을 차지했을 뿐, 12년이 되도록 메이저 대회 우승은 한 번도 없다. 2006년 토리노에서 사샤 코헨(34)이 은메달을 따내며 체면치레를 했고, 2014년 소치에서는 김연아, 아사다 마오 등 아시아 최고스타들과 카롤리나 코스트너(31ㆍ이탈리아)의 그늘에 가려 조연 역할만 했다.
강주형기자 cubi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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