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표범 바키라, 불곰 발루, 늑대 아키라, 호랑이 시어칸, 인도 왕뱀 카아, 그리고 요란스러운 원숭이들과 사람들.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로도 알려진 동화 ‘정글북’(1894)에 나오는 주요 캐릭터들이다. 인도의 밀림지대에 큰 불곰(brown bear)과 늑대 무리가 어울려 산다는 게 좀 어색하지만, 어차피 소설은 허구이니 아프리카와 아마존 밀림을 섞어 놓은들 그걸 탓할 일은 아니다. 다만 사실에 근거했다면 소설의 현실감이 더 살아났을 지는 모르겠다.
만약 늑대에게 키워진 사람의 아이인 '모글리'가 떠난 후 ‘정글북’의 동물 주인공들이 동물원에서 살게 됐다면? 야생동물 수의사로서 나는 그 근황을 바로 전해 줄 수는 있다. 왜냐면 어느 동물원이든 동물들의 처지는 대개 비슷하고 내가 근무했던 동물원에 다행히 바로 그 동물 종들이 모두 다 있었기 때문이다.‘정글북’ 주인공들을 동물원에서 만났다는 가정 하에 그들의 이야기를 꾸며내 보았다.
무료함에 상처 난 꼬리를 핥는 검은 표범 ‘바키라’
우선 검은 표범 바키라는 올 겨울에 꼬리 끝에 심하게 동상이 걸렸다. 그러더니 어느 날 그 꼬리 끝의 피부가 떨어져 나가 빨간 살과 하얀 꼬리뼈가 그대로 드러났다. 무료한 하루, 할 일도 없으니 마치 놀이인 듯이 계속 그 상처를 핥다 보니 나을 턱이 없었다. 결국 마취 수술로 단단히 꼬리 끝을 여미어 꿰매 주었지만 단 하루도 못 가서 스스로 봉합을 풀어버리고 다시 핥기 시작했다. 상처는 점점 깊어지고 수의사인 내 근심도 따라 늘어만 가고 있다.
악성 치질에 거린 불곰 ‘발루’
불곰 발루. 발루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그 무거운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다 보니 지난해부터 항문에서 조금씩 피가 나기 시작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악성 ‘치질’에 걸린 게 발견됐다. 야생에서는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 네 발로 뛰어다니느라 이런 병이 생길 겨를조차 없을 테지만 턱없이 좁은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곰들에게는 종종 이런 일이 발생한다. 요즈음은 자꾸 그곳이 아파 오는지 마시라고 만들어준 물통 속에 푹 들어가 하루 종일 스스로 냉찜질도 해 보지만, 통증은 쉬이 가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모욕적인 개 취급에 으르렁대는 늑대 ‘아키라’
늑대 아키라. 아키라는 최근에 동물원에 들어왔다. 그런데 평원을 활보하던 아키라는 동물원에선 개집 옆에서 거의 개 취급을 당하고 있다. 사실 개 종류 중에 늑대를 닮은 허스키 녀석은 마치 자기 짝이나 만난 듯 좋아한다.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아키라에게는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이 꼴 저 꼴 안 보려고 내실에 틀어박혀 있으면 어느새 사육사가 나타나, 나가서 네 밥값이나 하라고 쫓아낸다. 울타리 곁에 붙어서 한참 으르렁대다가 결국 포기하고 구석 대기에 웅크리고 앉아 차라리 눈을 감아버린다.
새로 온 수컷에 심기 불편 벵골호랑이 ‘시어칸’
벵골호랑이 시어칸. 시어칸은 요즘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 저번엔 느닷없이 사람들이 들어와 전기 울타리를 설치하며 운동장을 반으로 쪼개더니, 반대쪽에 자신과 비슷한 체구의 수컷 호랑이가 포함된 여러 마리 호랑이들을 한꺼번에 새로 들였다. 나름대로 제가 최고라고 자처하고 있었는데 암컷까지 거느린 그 녀석은 몸집도 크고 눈도 부리부리한 게 매우 위협적이다. 텃세를 부려 몇 번 우르릉거려 보았지만 속으로는 이미 그 녀석의 기에 눌려있다. ‘암컷 한 마리 나누어 주면 안 되겠니?’ 차라리 아부라도 해볼까 고민 중이다.
무념무상 왕뱀 ‘카아’와 여전히 촐랑대는 원숭이들
왕뱀 카아. 그는 일주일에 생닭 한 마리씩 먹는 것 이외에는 거의 박제처럼 움직이지 않고 무념무상의 경지에 다다랐다. 원숭이 녀석들은 여전히 철딱서니가 없다. 동물원에 갇히고서도 그저 과자 던져주는 사람들에게 아부하느라 정신 없다.
모글리는 아마도 동물원을 찾는 저 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글리는 과연 동물 친구들을 기억이나 하는 걸까?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모글리?’ 하고 불러 봤지만 떠난 이후 지금까지 누구 하나 대답이 없다.
글·사진 최종욱 야생동물 수의사('아파트에서 기린을 만난다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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