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은 국가 지도자의 역할을 물을 일이 많았던 해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대한민국에선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 이뤄졌다. 세계적으로도 지도자가 한 나라 인권의 진보와 후퇴를 좌우하는 일은 여럿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법치와 민주주의가 인간다운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는 흐름이 훨씬 도드라졌다는 사실이다.
최강국 미국에 도전장을 던지며 집권 2기를 선언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중국은 통제사회의 고삐를 더욱 바짝 조였다. 해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유튜브 등에 접속을 불허한 것은 구문이 됐고, 중화민족의 중흥을 도모한다면서 중국식 온라인 검열 강화를 내비쳤다. 그나마 언론 자유가 보장됐던 홍콩 미디어도 대부분 친중 기업 손에 들어갔다. 그 사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인권운동가 류샤오보(劉曉波)가 숨졌다. 현대판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불릴 만큼 극심한 언론 탄압 속에서 그의 죽음을 보도한 중국 언론은 전무했지만 국제사회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미국의 변화는 보다 극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1년도 안돼 미국 사회는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 트럼프는 인종주의를 전면에 불러냈다. 150년 동안 흰색 두건을 뒤집어 쓰고 음지에서 테러를 일삼던 백인우월주의 단체 쿠클럭스클랜(KKK)은 이제 버젓이 회원을 모집한다. 인종차별 발언은 일상이 됐다. 대낮 커피 매장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을 향해 “한국어가 역겹다(disgusting)”는 말을 거리낌없이 내뱉어도 반응은 심드렁할 뿐이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 1776년 독립과 동시에 건국 지도자들은 그 선언문에서 국민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알렸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제가 틀리지 않았다면 틀린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일성으로 노예해방을 관철시켰다. 지도자의 단호한 한마디와 민중의 피, 땀이 어우러져 일궈 낸 양성평등, 인종차별 철폐의 역사를 트럼프는 거스르려 하고 있다. 누군가는 원래 존재했고 기회만 엿보던 악습이 이제서야 민낯을 내보였다고 하나, 문제는 옳지 않은 가치가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럴 수도 있는 것”이 돼 버린다는 점이다. 위험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시민의 힘으로 쌓아 올린 인권 진보의 공든탑이 무능한 통치자에 의해 무너져 내릴 위기에 처했다. 박근혜정부가 2015년 12월 일본과 체결한 일본군 위안부 합의의 검은 속내가 까발려졌다.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이 나온 이후 이 문제를 전 세계에 알리고 관심을 끌어내기까지 걸린 시간을 떠올리면 참담하기까지 하다. 영화 ‘아이캔스피크’가 전하는 울림은 지난한 호소의 극히 일부분이었다. 할머니들의 아픔을 보듬으려는 작은 목소리, 수요집회는 1,317회, 9,486일째 진행형이다. 외교부가 낱낱이 공개한 졸속 합의 과정은 이런 시민사회의 노력을 무참히 짓밟았다.
물론 절망의 시간만 있지는 않았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100년 넘게 지속된 원주민 어린이들의 강제동화 정책이 실상은 ‘아동 학대’이었음을 고백했다. 유엔 연설에서는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한다”고도 했다. 눈물까지 흘린 총리의 진심 어린 사과는 잔잔한 감동을 줬다.
한 명의 지도자가 인권사의 발전을 추동한 사례는 적지 않다. 비폭력ㆍ불복종 운동을 이끈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그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는 인종분리 정책 ‘아파르트헤이트’를 허문 구심점이었다. 그 곁에서 수많은 이들의 참여와 숭고한 희생은 빠진 적이 없다. 결국 좋은 지도자를 만드는 것은 시민의 몫이다. 왕정시대와 달리 우리는 시민의 인간다움을 보장해 줄 지도자를 민주적 절차를 거쳐 뽑고, 또 내칠 수 있다. 2018년에도 그런 기회가 있다. 6ㆍ13 전국동시지방선거가 162일 앞으로 다가왔다.
김이삭 국제부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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