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영화에 제가 참여하다니 정말 뿌듯합니다.” 최선을 다했어도 더 잘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건만, 배우 김태리(28)는 그 아쉬움을 꾹 삼켰다. 자신의 부족함을 입 밖에 꺼내는 게 영화 ‘1987’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값진 기회” “인복” “뿌듯하다”는 말들로 영화의 의미를 한껏 높이면서 자신을 낮췄다. 속 깊은 배우다.
1987년 민주화 열망을 고스란히 품은 이 영화에서 김태리는 대학 신입생 연희를 연기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알리려는 교도관 삼촌(유해진)에게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고 원망하던 연희는 대학 선배의 죽음을 목격하며 시대에 눈을 뜬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김태리는 “그 시대는 물론 지금 이 시대의 보통 사람을 대변하는 캐릭터가 연희”라며 “그동안 내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는지 돌아보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양심과 의지가 모여 역사를 바꿨다고 말하는 이 영화의 메시지를 1990년생인 김태리가 현실에서 경험한 적이 있을까. “대학 시절에 선배를 따라서 등록금 투쟁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도로를 점거하고 즐겁게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하는 기분이 색다르더라고요. 하지만 자발적으로 참여한 게 아니라서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요. 지난겨울 촛불집회가 제 의지로 나간 첫 집회였어요.”
어떤 신념을 갖고 선택한 작품은 아니지만 촬영을 하면서 부담이 커졌다. 주요 인물들이 릴레이하듯 차례로 극의 중심에 등장하는 전개 방식 때문이다. 김태리는 전반부의 긴장감을 후반부에 이어 가면서 마무리까지 지어야 하는 책임을 안았다. “연희의 감정 변화를 풀어내기가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혹시라도 연희의 등장 이후 영화가 두 편의 이야기로 보일까 봐 걱정도 되더라고요.”
낙천적이고 강단 있는 성격이라 연기도 대차게 해내는 듯했지만, 내심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영화를 촬영하다 유해진에게 상담도 했다. 연기가 점점 어려워진다고. 유해진은 후배를 따뜻하게 다독였다. “나도 괴로워, 그런데 어떻게 하겠어, 그냥 하는 거지.” 김태리에겐 더없는 격려가 됐다. “앞날을 걱정하거나 계획한다고 해서 그대로 이뤄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선배님 말씀대로 그냥 열심히 하는 게 정답인 것 같아요.”
유해진뿐 아니라 김윤석 하정우 이희준 박희순 등 베테랑 배우들과 이번 영화에서 호흡을 맞췄다. 데뷔작인 ‘아가씨’(2016) 때부터 큰 기회가 연달아 주어지고 있다. 올해에는 임순례(‘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가 개봉하고, 김은숙(‘태양의 후예’와 ‘도깨비’ 등) 작가의 신작 ‘미스터 션샤인’으로 안방극장과도 인사한다. 이 드라마에선 이병헌과 작업한다. 김태리는 “선배들과 연기하면서 배우는 건 정말 가치 있는 경험”이라면서도, 그 기회에 따르는 기대감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2017년에는 왠지 불안했어요. 별로 행복하지도 않았죠. 자다가 퍼뜩 놀라 깨는 일도 있었어요. ‘아가씨’로 큰 상(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등)을 받으면서도 실감하지 못한 부담이 이제야 느껴지는 것 같아요. 새해에 한국 나이로 스물아홉인데, 아홉수를 호되게 앓으려나 봐요. 호빵 하나에도 행복해하던 저인데… 그 소중함을 잊지 않으려고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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