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어진 ‘탄핵’ 벽보선 촛불 함성 들리는 듯
‘적폐 심판’ 법원 출입문엔 어지러운 손자국
북한 도발 때마다 전투기 출격 바퀴자국 가득
#2
JSA 귀순 병사, 목숨 건 탈출 ‘탄흔’으로 남아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엔 1073일 고통의 기억
포항 지진은 건물 곳곳 할퀴며 ‘상처’ 입혀
이보다 더 드라마틱할 수는 없었다. 주말 밤마다 전국 광장을 뒤덮었던 촛불의 행렬, 헌정사상 유례가 없었던 현직 대통령 탄핵, 이로 인한 조기 대선과 새 정부의 출범, 곧바로 시작된 적폐청산 드라이브와 파격적 정책실험들까지. 2017년은 이렇게 휘몰아치듯 지나갔다.
이보다 더 위태로운 적도 없었다. 북한의 거듭된 핵ㆍ미사일 도발과 말로만 따진다면 훨씬 더 도발적인 미국 사이에서 국민들은 전쟁, 그것도 핵 전쟁에 대한 공멸의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2017년은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결정할 수 없다는 좌절과 공포의 시간이었다.
유난히 대형 사건사고도 많은 한 해였지만 시간의 흐름 앞에서 이젠 환희와 분노, 희망과 절망, 통합과 분열의 기억도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다. 하지만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 가기 위해선 그 뜨거웠던 어제의 한 장면 한 장면들을 반추하고 음미해야 한다. 2017년 역사의 현장에 남겨진 흔적들을 따라가 봤다.
▦대통령 파면
헌법재판소의 주문대로, 3월 10일 ‘대통령 박근혜’는 파면됐다. 연 인원 1,600만명이 모였던, 또 그 수만큼의 촛불이 밝혔던 광화문광장은 국민의 주권을 구현하고 확인한 현장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한 해가 저무는 지금 광장에는 ‘대통령 퇴진 촉구’ 스티커만 찢기고 해진 채로 남아 그날의 함성을 희미하게 전하고 있다. 스티커 속 수의를 입은 박 전 대통령의 합성이미지는 그대로 현실이 됐고 법의 심판은 아직 진행 중이다.
▦적폐 수사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검찰은 박근혜ㆍ이명박 정부 시절의 불법행위에 대한 대대적 수사에 착수했다.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과 군 정치공작 의혹, 국정원 특수활동비 상납 의혹 등 수사 중인 사건만 19건에 달한다. 이른바 ‘적폐 수사’를 통해 검찰은 42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이 중 27명이 구속됐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비롯한 피의자들은 영장실질심사가 열린 서울 중앙지법 출입문에 어지러운 손자국을 남겼다.
▦북한의 잇단 도발
북한은 역대 최대 규모인 6차 핵실험을 비롯해 총 16차례의 미사일 시험 발사를 감행했다. 한반도는 물론 미국 본토마저 위협하는 북한의 무모함에 한미는 B-1B 전략폭격기 등 전략자산들을 총동원, 대북 억지력 과시로 맞대응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전투기가 뜨고 내렸을까. 2017년 한반도 긴장상황은 경기 평택 오산 미 공군기지 활주로에 수많은 전투기 이착륙의 흔적을 남겼다.
▦세월호 인양
3월 23일 침몰 1,073일 만에 세월호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녹슬고 때묻고 여기저기 구멍 난 선체는 희생자 가족들의 마음을 또 한 번 할퀴었다. 7개월여의 수색을 통해 조은화ㆍ허다윤양, 고창석 교사, 이영숙씨의 유해가 수습됐지만 박영인ㆍ남현철군, 양승진 교사, 권재근씨와 혁규군 부자의 유해는 찾지 못했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결국 11월 18일 목포신항을 떠났다.
▦포항 지진
11월 15일 경북 포항 지역에서 큰 지진이 발생했고, 허약한 건물들은 무너지고 금이 갔다. 이로 인해 다음 날 예정됐던 대입수능이 전국적으로 일주일 연기되는 초유의 결정이 내려지기도 했다. 포항엔 현재까지 75차례의 여진이 이어지고 있다. 지진의 흔적을 안고 살아야 하는 주민들의 불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비정규직은 이 땅에 사는 약자들의 멍에와도 같은 것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야심 차게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했지만, 이로 인한 경영상의 부담과 정규직과의 갈등 등 풀어야 할 숙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규직화의 속도도 더딜 수밖에 없다. 한 비정규직 노조간부의 달력에 빽빽하게 적힌 투쟁일정이 아직 갈 길 먼 정규직화 정책의 현실을 보여 준다.
▦귀순 병사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남측 건물 외벽엔 지금도 탄흔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11월 13일 북한군 병사의 귀순 과정에서 이를 제지하기 위해 북한군이 쏜 40여발의 총탄은 귀순 병사의 좌ㆍ우측 어깨와 복부, 허벅지 등 5곳에 총상을 입혔고 이 건물과 나무 등에 흔적을 남겼다. 이국종 교수의 도움으로 다행히 이 병사는 지금 회복 중이다.
▦잔혹범죄
점점 더 잔혹한 사회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평범한 중년여성이 납치 살해의 표적이 됐고, 10대 여학생은 초등학생을 죽이고 유기했다. 천사의 탈을 쓰고 딸 친구까지 살해한 어금니 아빠의 엽기적 행적은 충격 그 자체였다. 흉포한 강력 범죄사건의 현장검증 때마다 피해자 역을 대신해 온 서울경찰청 과학수사팀의 마네킹에도 상처가 가득하다. 잔혹범죄의 흔적이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박미소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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