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인생
데이나 스피오타 지음 황가한 옮김
은행나무 발행 352쪽 1만4,000원
물리적으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 실제로는 6명의 자아가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인간의 자아는 대화 상대가 앞에 놓이는 순간 이미 세 명-①나 ②상대방이 인식하는 나 ③상대방이 나라고 짐작하리라 상상하는 나-으로 나뉘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 기본 이론은 왜 ‘완벽한 소통’이 불가능한지, 사람들 사이의 오해와 기만이 어디서 시작하는지 어설프게나마 설명해준다. 타인이 생각하는 나와 순수한 나 자신, 타인이 봐주길 바라는 나의 간극이 이미 너무 크니까.
미국 작가 데이나 스피오타의 신작은 이 간극들이 만드는 불행을 30년간 추적한다. 여기, 나름 나름으로 불행한 여자들이 있다. 먼저 겉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는 여성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메도 모리. 로스앤젤레스의 명문 웨이크 학교를 최고 성적으로 졸업한 메도는 졸업 작품의 대상이 됐던 전설의 영화감독 오슨 웰스를 찾아간다. 착하고 가난한, 그래서 부모의 신뢰를 듬뿍 받는 친구 캐리를 팔아 9개월간 웰스의 집에서 동거한 그녀는 비밀스러운 사랑 후, 영화감독의 길로 들어섰다고 고백한다. 작가는 메도의 영화 작업을 따라가며 그녀가 유명 감독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양한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메도는 실패자들, 소외된 자들, 범법자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사회적 이슈가 될 만한 사건의 이면을 포착한 다큐멘터리로 영화계의 스타가 된다. 그녀가 새로 찾은 먹잇감은 니콜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병을 앓고 시력의 대부분을 잃었다. 시각 대신 청각과 말 주변이 기형적으로 발달하게 된 니콜은 전화 판매원으로 취직하고, 이후 지위를 십분 활용해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에게 무작위로 전화를 건다. 그리고 화려한 무대 뒤, 홀로 외로워하는 이들의 내면에 접근한다. 물론 절대 만나지 않은 채. 니콜은 돈을 요구하지도 성적(性的)으로 접근하지도 않는 진심 어린 대화로 할리우드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메도는 니콜을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빚어내는 사람’, 일종의 예술가라고 치켜세우며 영화를 찍자고 설득하고 그렇게 찍은 영화 ‘내부의 교환원’은 대박을 맞는다. 현대인의 고독, 타인과 연결에 대한 갈망을 그린 수작이란 호평과 별개로, 니콜은 메도가 예술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비난한다.
메도는 이제 새 작품 주인공으로 세라 밀스를 낙점한다. 세라는 약과 술에 취해 자신의 집을 방화해 7개월 된 딸과 남편을 죽인 혐의로 19세에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메도는 세라가 극빈층 마약중독자였기 때문에 자백을 강요 받았을 거라 추측하고 영화를 통해 이면의 진실을 널리 알려 그녀를 구원하겠다고 자신한다. 메도는 니콜에게 한 것처럼 세라에게 접근하지만, 기대와 달리 세라는 진짜 살인자였고, 메도는 자신이 보고 싶던 현실과 다른 모습에 감옥에서 도망치듯 나온다. 정신 없이 운전하다 교통사고까지 낸 메도는 자신의 영화가 얼마나 위선적이었는가를 처음 깨닫는다. 그리고 영화 제작을 그만두고 학교로 가 아이들에게 진짜 영화를 가르친다.
감옥에서 세라는 아침마다 자신이 죽인 딸을 위해 기도한다. 딸이 자신처럼 사는 걸 원치 않아 연기 속에 죽어가는 딸을 그대로 두었던 세라는 아침 기도로 자기 방식의 구원을 얻는다.
영화 ‘시민 케인’을 연출한 오슨 웰스와의 가상 연애를 에피소드로 넣은 것처럼, 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실제와 가상을 교묘하게 뒤섞은 패러디가 작품 내내 펼쳐진다. 메드 모리의 성은 웰스의 세 번째 부인 파올라 모리에게서, 캐리 웩슬러의 성은 촬영감독 해스컬 웩슬러에게서 따오는 식이다. 작품 배경인 웨이크 학교 역시 배우 기네스 팰트로 등이 졸업한 크로스로즈 학교를 패러디했다. 니콜의 연애사는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빌리 조엘, 워런 비티, 보노, 리처드 기어, 에릭 클랩턴 등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와 전화로만 연애한 휘트니 월턴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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