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저지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은 23번 버스의 기사다. 아내 로라, 마빈이라는 잉글리시 불독과 함께 산다. 아침 6시 12분경 눈을 떠서는 시리얼로 속을 채우고 아내가 준비해놓은 도시락을 들고 걸어서 출근한다. 패터슨은 시를 좋아하고 시를 쓴다. 출퇴근길은 시상을 가다듬기 좋은 시간이다. 운행 직전이나 자투리 시간에 작은 노트에 시를 쓴다. 폭포 앞 공원 벤치를 자주 이용한다. 퇴근하면 아내와 저녁을 먹은 뒤 마빈을 데리고 산책을 나간다. 단골 바에 들러 맥주 한 잔을 마신다. “잔을 내려다보면/기분이 좋다.” 이런 일상이 그의 시다. 좋아하는 성냥갑의 확성기 모양 로고가 ‘사랑 시’로 발전하고, 운전 중에 본 거리의 사람과 풍경이 시가 된다. 지하실 한쪽의 작은 책상 위에는 그가 존경하는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이 있다. 의사이기도 한 윌리엄스는 그처럼 패터슨에서 나서 패터슨에서 살며 시를 썼다. 일상 구어의 대담한 도입과 운율의 실험으로 유명하다. 만년 시집 ‘패터슨’은 도시 패터슨 이야기다. 로라가 보기엔 남편 역시 뛰어난 시인인데, 정작 그는 자신의 시를 남들에게 보일 생각이 별로 없다.
짐 자무쉬 감독의 ‘패터슨’(2017)은 그렇게 버스 기사 패터슨의 하루하루를 지켜보는 영화다. 영화는 패터슨의 시가 그런 것처럼, 패터슨이 살아가는 일상의 속도와 리듬으로 찍힌 것 같다. 껑충한 키의 패터슨은 약간 안짱다리 같은 걸음으로 성큼성큼 걷기도 하고 주변 풍경을 보며 느릿느릿 걷기도 한다. 패터슨이 모는 버스의 멈추고 나아가는 속도와 시선도 영화의 중요한 리듬이다. 퇴근길에 만난 쌍둥이 소녀는 자신의 시 ‘물이 떨어진다(Water Falls)’를 읽어주며 운(韻)이 잘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부끄러워한다. 패터슨은 말한다. “앞 두 연은 운이 잘 맞는 것 같은데. 근데 난 사실 운이 안 맞는 게 더 좋아.”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기도 하는 게 사람 사는 일일 것이다. 패터슨과 로라의 아침 잠자리 모습이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것처럼. 우편함을 매일 몰래 넘어뜨리는 마빈의 장난질처럼. 영화의 또 다른 리듬은 시가 자막과 함께 패터슨의 웅얼거리는 듯한 낮은 음성으로 스크린에 한 줄씩 떠오르며 내려올 때 생긴다. 폭포, 소녀의 시 ‘물이 떨어진다’와 함께 이 아름다운 수직의 리듬이 주는 감흥은 설명하기 힘들다. 패터슨 역을 맡은 아담 드라이버의 버스처럼 무덤덤하게 긴 얼굴이 들려오는 승객들의 이야기에 지긋이 웃음을 머금을 때, 한 인간의 아름다움도 그렇게 얼굴 아래 조용히 깃든다. 일상의 느릿한 수평선을 따라가며 술집 주인 닥, 로라와 에버렛, 도시의 이웃들(코인 세탁기 앞에서 랩을 연습하는 이!)에게 공평하게 향하는 카메라의 시선도 패터슨의 시를 닮았다. 영화는 아내 로라의 꿈도 소중하게 지켜본다. 실상 쌍둥이에 대한 로라의 꿈처럼 그녀의 꿈의 일부는 패터슨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느낀다. 어떤 불안을. 둘은 함께 있지만 얼마간 따로 떨어져 있다(쌍둥이들이 그런 것처럼). 영화는 시종 그 미묘한 거리(距離)를 느낄 수 있게 찍혀 있다. 패터슨의 시도 그러하다. 금요일과 토요일의 작은 사건들은 정말 견딜 만한 것일까. 도시 패터슨의 평화는 이상하게 위태롭다. 세상 어디나 일상은 전혀 만만한 게 아닐 터이다.
영화의 마지막, 사라진 노트 대신 새 노트가 선물처럼 도착하고 패터슨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 시는 나중에 우리에게 남는 게 사랑하는 시의 딱 한 소절일 수도 있다고 들려준다. “밝은 하늘(air)에서 물이 떨어진다 (…) 찰랑거리는 머리칼(hair)처럼 (…) 사람들은 이걸 비라고 부른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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