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다이어트 그리고 아파트 원시인
매를린 주크 지음ㆍ김홍표 옮김
위즈덤하우스ㆍ464쪽ㆍ1만8,000원
진정한 것과 진정하지 않은 것. 이를 논할 때 우리의 기준은 자주 시간이 된다. 오래된 것은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진정한 취급을 받고, 새로 나온 건 그 이유만으로 진정하지 않다는 판정을 받는다. 가장 최신의 생물종 중 하나인 인간이 이토록 텃세를 부린다는 건 이상한 일이지만, 여전히 화학조미료에 얼굴을 찌푸리고 파스타에 고개를 저으며 알몸으로 산의 정기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의 진화생물학자 매를린 주크의 ‘섹스, 다이어트 그리고 아파트 원시인’은 이 같은 텃세에 보내는 코웃음이다. 그의 상대는 구석기를 이상적인 시대라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조미료도, 농경도, 도구도, 일부일처제도 없었던 구석기의 생활환경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에 가장 잘 부합한다는 이들을 향해 저자는 단호히 답한다. 구석기 시대는 진정한 시대가 아니라 춥고 불편하고 극복해야 할 시대였다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은 진화했으며 그 진화는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라고.
“구석기 환상은 부분적으로 우리 인간 또는 인간 이전의 사람속 구성원이 그들의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했다는 가정에 바탕을 둔 ‘환상’이다. 우리는 진화에 대한 이런 잘못된 생각을 인간뿐 아니라 다른 생명체에도 적용한다. (…) 인간과 마찬가지로 어떤 종도 환경과 무난히 부합한 적은 없었다. 설령 자연선택이 현생인류에게 강제하는 절충안이 지금은 없다고 해도 우리 인간은 진화의 역사를 거쳐온 타협 또는 ‘그럴싸한’ 해법의 산물이다.”
‘나는 자연인이다’ 류를 비롯해 한국의 구석기 환상도 뿌리가 깊지만, 서구에서는 좀 더 진지하게 이런 생활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었다. 2010년 뉴욕타임스, 시드니 모닝 헤럴드 등은 ‘도시 원시인들’을 조명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가공된 음식을 피하고 주로 육식을 하며, 마치 포식자를 피해 달아나듯 열심히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가끔 헌혈도 한다. 원시인들이 사냥할 때 일어났던 출혈을 재현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극소수의 이상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메간 폭스, 케이트 허드슨 등 유명한 할리우드 스타들도 자신의 건강 비결로 ‘구석기 다이어트’를 언급한 적이 있다. 곡물의 녹말은 비만과 성인병을 유발하며, 유제품과 가공식품은 진정한 인간은 소화할 수 없는 진정하지 않은 음식이란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우유를 소화하기 위해 인류가 차근차근 진화했다는 것, 녹말섭취가 농경에서 시작됐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점, 구석기 시대의 과일과 채소가 결코 지금의 맛과 같지 않았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설명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틀의 문제가 있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진화의 속도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진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꼭 수백만 년에 걸쳐서 일어나는 것만은 아니다. 구석기 시대처럼 특정 시기 이후로 뚝 끊겨버리는 것도 아니다. 동물행동 연구가 주종목인 저자는 자신의 눈 앞에서 일어난 귀뚜라미의 진화에 대해 들려준다.
그는 하와이에 최소 150년 전 유입된 한 귀뚜라미 종에 대해 연구 중이었다. 다른 귀뚜라미들처럼 이들도 시끄럽게 노래했고, 이는 번식에 필수라는 점에서 유전자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섬에는 귀뚜라미의 울음 소리를 듣고 그들의 몸에 유충을 떨어뜨려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기생파리가 있었다. 5년 뒤 다시 찾은 섬은 적막했다. 주크는 귀뚜라미가 멸종했다고 생각했지만 곧 바닥에서 펄쩍이는, 노래하지 않는 귀뚜라미와 마주했다. 살기 위해 번식을 포기한 변종 귀뚜라미가 탄생한 것이다. 5년이란 시간은 귀뚜라미 세계에서 약 20세대에 해당한다. 이는 인간세상으로 치면 겨우 수세기에 불과하다.
인간은 몇 백 년 만에 다른 인간이 될 수 있을까. 41세기의 인간은 21세기의 인간과 체질부터 다를까. 저자에 따르면 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바뀔지는 이 책의 주제가 아니다. 저자는 다만 암, 비만, 거북목으로 고통 받는 현대인들이 과거 미화로 향해버리는 걸 막고자 한다.
“친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허우적대는 인간을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다. 그렇지만 커다란 맥락에서 간혹 우리는 모두 물을 박차고 나온 물고기 같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살아가는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것이다. 과연 그런 환경이 있기는 했던가?”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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