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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신탁통치 오보사건(12.27)

입력
2017.12.27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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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모스크바 3상회의' 오보.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모스크바 3상회의' 오보.

1945년 12월 27일, 석간 동아일보가 모스크바 3상회의 관련 기사를 1면에 실었다. 미국이 한국의 즉각 독립을 주장한 반면 소련이 38선 분할 점령을 위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제목의 기사였다. 26일 밤 워싱턴 발 합동통신 기사를 인용한 그 보도, 엄밀히 말하면 기사 제목은 명백한 오보였다.

1943년 11월 미국 영국 중국 정상의 카이로선언(“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주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 등 전후(戰後) 해법을 두고 이어진 일련의 국제회의 끝에 모스크바 3상회의(미ㆍ영ㆍ소)가 45년 12월 16~27일 열렸다. 한국 의제의 주요 쟁점은 언제 어떤 절차를 거쳐 독립시킬 것인지 하는 거였다. 27일 공식 발표된 합의 내용은 첫째 임시정부 수립, 둘째 임시정부 구성 및 원조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 설치, 셋째 임정과 공위의 신탁통치안 마련 등이었다. 논란의 핵심은 신탁통치 기간이었다. 미국 안은 최소 5년 최장 10년이었고, 소련 안은 최장 5년이었다.

25일 AP, UP 통신의 25일자 추측 보도가 오보의 발단이었다. 그 기사가 26일 밤 합동통신을 거쳐 27일자 국내 신문에 실리는 과정에서 왜곡 증폭됐다. 당일 조간 조선일보 등도 그 기사를 보도했으나 동아일보의 기사, 특히 제목이 단정적이었다. 기사에는 “삼국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라는 단서가 달렸지만 제목은 확정적으로 미국의 즉시독립, 소련의 신탁통치를 못박았다. 당시 동아일보는 반탁 진영이던 우파정당 한민당의 입장을 가장 맹렬히 반영하던 신문이었다.

동아일보 보도를 기점으로 반탁운동이 폭발했다. 반탁을 제2의 독립운동으로 규정했던 이승만 진영은 물론이고 김구의 임시정부 진영도 신탁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하고 30일 국민 총파업을 단행했다. 반탁에 미온적이던 송진우가 암살됐고, 김규식 안재홍 박헌영 김원봉 등 찬탁론자들은 매국노로 몰려 상시적인 테러 위협에 시달렸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진영은,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선 박헌영 계열의 남로당이었다. 해방 정국의 가장 뜨거운 대립과 갈등, 유혈의 전선이 그렇게 그어졌다.

허망한 가정이지만, 근대사 연구자 중에는 동아일보의 저 오보가 없었다면 해방ㆍ건국 초기 이념적 갈등과 분단, 전쟁이 없었거나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라 보는 이도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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