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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지구촌을 움직인 영웅] 칼 든 테러범에 맞서 시민들 구하다

입력
2017.12.24 19:0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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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이트보드로, 빵 상자로 맞서

공격 타깃 자처 테러범 유인하기도

스케이트보드로 테러범과 맞서 싸우며 한 여성의 생명을 구했던 은행가 이그나시오 에체베리아. 그는 그러나 테러범 칼에 찔려 결국 사망했다. 호아킨 에체베리아 페이스북 캡처
스케이트보드로 테러범과 맞서 싸우며 한 여성의 생명을 구했던 은행가 이그나시오 에체베리아. 그는 그러나 테러범 칼에 찔려 결국 사망했다. 호아킨 에체베리아 페이스북 캡처

올해 6월 3일 밤 10시8분부터 10시16분까지, 고작 8분에 불과한 이 짧은 시간은 영국 런던 브리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길게만 느껴진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사이, 이슬람 극단주의자 3명이 승합차를 몰고 인도로 돌진, 보행자들을 친 후 인근 상점가인 버러 마켓에서 내려 시민들에게 흉기를 휘두르다 경찰에 의해 모두 사살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날 테러로 8명이 사망했고, 48명은 부상을 당했다.

그런데 이 ‘공포의 8분’ 동안, 자신의 안전을 챙기기보다 위험에 빠진 생면부지의 타인들을 구하고자 생명을 걸었던 평범한 사람들이 있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커다란 칼을 쥔 테러범들에 맨몸으로 맞선 이들이 아니었다면, 사상자들은 훨씬 더 늘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쏟아진 ‘영웅’이라는 찬사가 결코 과하지 않은 이유다.

HSBC은행 런던지점에서 일하던 스페인 출신 이그나시오 에체베리아(39)은 그날, 친구 2명과 함께 스케이트 보드를 타며 평범한 토요일을 보내고 있었다. 늦은 저녁식사를 하려 했던 그는 테러범이 한 여성을 공격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지체 없이 몸을 던져 자신의 스케이트 보드로 테러범을 내리치며 이 여성을 구해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테러범 칼에 찔린 그는 끝내 세상을 등졌다.

빵을 담는 박스 2개만으로 테러범을 상대한 제빵사도 있다. 루마니아 출신 플로린 모라리우(32)는 테러범 3명의 난동을 보자마자 가게 밖으로 일단 뛰쳐나갔다. 그는 “어떻게 대처하거나 반응해야 할지 몰랐고 나 자신도 위험하다 생각했다”면서 “우선 박스 하나를 던지고 나서 테러범이 피하던 순간, 그에게 다가가 다른 박스로 머리를 내리찍었다”고 말했다.

범인들을 경찰 쪽으로 유인하기 위해 공격 타깃을 자처한 시민도 있었다. 버러 마켓 술집에서 유럽 축구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중계를 본 뒤 귀가하던 제라드 보울스(37)는 칼에 찔린 여성이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테러범들 쪽으로 의자와 유리컵, 병 등을 집어 던졌다. 그는 “이들이 날 쫓아오면 경찰이 있는 큰 길 쪽으로 몰 수 있을 것 같아 ‘어이, 겁쟁이들’이라고 소리친 뒤,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 던졌다”며 “어리석은 일인 줄은 알았으나 사람들 목숨을 구하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비범한 용기를 발휘한 경찰관들도 빼놓을 수 없다. 교통경찰 2년차인 웨인 마르케스(38)는 진압봉 하나만으로 테러범 3명과 한꺼번에 결투를 벌였고 눈과 다리 등을 수 차례 찔려 한 때 중태에 빠졌었다. 당시 비번이던 런던 경찰청 소속 찰리 게니가울트(25)도 맨손으로 테러범 한 명과 격투를 벌이다 중상을 입었다. 마르케스는 부상 회복 후 영국 인디펜던트와 인터뷰에서 자신이 영웅인지는 잘 모르겠다면서 “나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하려 했던 것이고, 그게 내 직업”이라고 했다.

부상자들을 치료했던 런던 킹스컬리지병원의 의사 던컨 뷰는 “환자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들 다수는 자신보다 구급차에 함께 있었던 타인들을 먼저 걱정했다”면서 “런던에는 거대한 공동체 정신이 있다”고 말했다. 런던 시민들은 버러 마켓 테러 현장에 있던 장삼이사들의 ‘영웅적 행위’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날 테러 피해가 그나마 최소화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결국 연대의 정신이 있었던 것이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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