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AP통신은 1953년부터 문장의 규범을 담은 ‘스타일북’을 해마다 개정해 발표한다. 17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통신사가 만드는 스타일북은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언론과 작가들이 참조하는 공적인 영어 쓰기의 교범이다. AP통신이 지난 5월 개정한 올해 스타일북에서는 ‘They’ 용법이 화제였다. 성 다양성 존중 추세를 감안해 성별 구분 없는 삼인칭 대명사 복수형 ‘They’를 ‘He’ ‘She’ 대신 단수형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AP통신은 그 동안 단수형 삼인칭 대명사를 ‘They’나 ‘Their’로 받는 것은 잘못이라고 해왔다.
▦ 그렇다고 ‘He‘나 ‘She’ 대신 무조건 ‘They’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한 건 아니다. “자신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라는 사람이나, 자신을 ‘He’나 ‘She’로 부르지 말기 원하는 사람에 대한 글을 쓸 경우”로 한정했다. 그렇게 단수로 ‘They’를 쓸 경우도 “가능하다면 대명사 대신 직접 사람 이름을 쓰고, 인칭대명사가 불가피한 경우 그 말이 복수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도록 했다. ‘They’의 단수 표기는 AP통신이 처음은 아니다. 워싱턴포스트가 2015년에 비슷한 방침을 천명했고, 이를 평가해 미국방언학회가 ‘They’를 ‘올해의 단어’로도 선정했다. ‘They’를 단수로 사용한 용례는 따지면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한다.
▦ 영어 ‘He’ ‘She’에 대응하는 우리말은 ‘그’와 ‘그녀’다. 원래 우리말에는 이런 삼인칭 대명사 자체도, 성별 구분도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이광수가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무정’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광수는 소설에서 남녀 구분하지 않고 모두 ‘그’라고 했다. ‘그녀’는 국문학자 양주동의 수필 ‘신혼기’에 첫 등장한다. 근대화 시기 일본이 영어를 번역하면서 ‘가레(彼)’ ‘가노조(彼女)’라는 단어를 만들어 썼는데 이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반대도 많았다.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은 ‘그녀’를 일본 흉내인 데다 욕설인 “그년은”으로 들릴 수 있으니 쓰지 말자고 했다. 작가 김원우는 “여성들이 남성이 만든 제도적 구속, 상대적 열등감에 얼마나 시달리는지” 그린 소설 ‘세 자매 이야기’에서 의도적으로 ‘그’라는 표현만 썼다. ‘그녀’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건 1999년이다. 널리 쓴다는 현실을 수용한 것이라지만, ‘성평등’ ‘양성평등’ 구별 주장처럼 시류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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