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대학 유명밴드 드나들다가
딥퍼플 '차인드 인 타임' 첫 경험
차분하게 시작 10여분 서사 한편
결국엔 자퇴하고 기타리스트 길
지난달 CD 3장 분량 앨범 발매
딥퍼플의 자신감 여전히 부럽다
음악과 친해진 건 국민학교(초등학교) 때 리코더를 연주하면서부터다. 학교 합주단에 들어가 바로크 음악을 연주했는데, 제법 실력이 있었다. 학교 대표로 나간 경북 도내 리코더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탔고, 방송사 초청 등 지방 공연도 많이 다녔다. 그 때부터 음악하는 재미를 조금씩 알아갔던 것 같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전국을 유랑하던 내 음악 생활도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전도유망한 리코더 신동에서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가려니 조금 아쉽기도 했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록 음악에 빠졌다. 수십 명의 합주로 웅장한 소리를 구현해내는 오케스트라 연주와 달리, 4~5명만으로 귀를 꽉 채우는 음악을 만든다는 게 신기했다. 한 그룹 안에서 작사·작곡 편곡, 연주, 노래 등 모든 음악 작업들을 밴드 구성원들의 힘으로만 해내는 밴드만의 음악 제작시스템도 매력으로 다가왔다.
1979년은 MBC 노래 경연대회 ‘대학가요제’가 전성기일 때라 주변에서 대학교 록 밴드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중성자’란 3인조 밴드를 꾸리고 대학교 형들이 만든 밴드의 연습실을 찾아 다니며 록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경북에서 유명했던 경북대학교 밴드 일렉스와 메디칼사운드, 영남대학교 밴드 에코스의 연습실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어린 티를 못 벗은 중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형들의 음악을 배우겠다고 하니 형들 눈엔 기특해 보였나 보다. 평소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팝송을 들려주거나 직접 합주하는 모습도 보여주며 적극 도와줬다. 영국 록밴드 딥퍼플의 ‘차일드 인 타임’을 처음 들은 것도 그 즈음이다.
딥퍼플의 음악은 꼭 소설 같았다. 소설 안에 현실과 다른 세계관이 펼쳐지듯, 딥퍼플의 음악에도 새로운 세상이 담겨 있었다. ‘차일드 인 타임’은 키보드 연주자 존 로드와 드러머 이안 페이스의 차분한 연주 위에 이안 길런의 거친 보컬이 얹히면서 시작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3분 가량 지나면 리치 블랙모어의 진득한 기타 연주가 이어지고, 곡 중반쯤엔 박자가 쪼개지면서 연주의 흥취도 절정을 향해 간다. 다시 곡 초반의 리듬으로 돌아와 샤우팅 창법으로 곡을 마무리하기까지, 10여분에 걸쳐 한 편의 서사가 완성된다.
가사에 담긴 의미도 모르면서, 나는 그 음악에 빠졌다. 리코더를 익히며 공부했던 오케스트라 음악과는 또 다른 감동이었다. 특히 통기타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전자기타의 현란한 변주가 가장 내 마음을 끌었다. 알라딘의 마술램프를 연 것 같은, 기분 좋은 충격이 느껴졌다.
그 당시 전자기타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꾸 음악에만 빠지는 아들을 걱정하는 부모님을 설득해 전자기타를 하나 장만했다. 한 달 정도 학원에 가서 기타를 잡는 자세와 코드 잡는 법 등 기본적인 이론을 익힌 후 내 방에서 독학을 시작했다. 휴대용 트렌지스터 라디오는 나에게 좋은 선생님이 됐다. 연주가 손에 익고 실력이 늘자 속주도 연습하기 시작했다.
하드록의 시대였다. 미국의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키스, 영국의 레드 제플린 등 무수히 많은 하드록 음악을 접했다. 종종 친구들과 ‘중성자’ 밴드로 대학교 축제나 고고장에 나가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록 음악을 하면 할수록, 내 진로가 선명해졌다.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지만, 많은 가수들이 그랬듯 나 역시 말을 안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기타리스트가 되기로 결정하고 그 다음해 학교를 자퇴했다. 학교를 간다고 거짓말하고 동네 뒷산에 올라 기타를 잡았다. 손이 부르트도록 연습, 또 연습했다.
1980년대 초 대구의 한 클럽에 나가고, 이후 서울로 상경하며 나는 활동 폭을 넓혀갔다. 낙원상가에서 무명의 음악인들과 소통했고, 4인조 록 그룹 ‘수레바퀴’도 결성했다. 그룹 ‘백두산’의 리더 유현상을 만난 건 1984년 이태원의 한 클럽에서다. 무대에서 밴 헤일런의 라이트 핸드 주법을 선보였다가 전속 연주를 하게 됐고, 소문을 듣고 찾아온 유현상의 제안을 받아들여 새 그룹을 결성했다.
백두산은 1986년 발매한 정규 1집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우린 대중성을 추구하지 않았다. 딥퍼플, 레드 제플린과 같이 국제적인 실력파 뮤지션으로 인정받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1989년 가수 임재범과 함께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정규 2집 앨범을 만들면서 국내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느껴졌다. 문득 ‘직접 록의 본고장에서 배워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기타리스트로 살기로 했는데, 정통 록의 정신과 문화를 한 번쯤은 직접 보고 음악에 접목해봐야 하지 않겠나.
1990년 임재범과 함께 ‘세계 시장을 목표로 명반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에서 그룹 ‘아시아나’를 만들었다. 최상의 환경에서 음악을 만들자는 생각에 레코딩도 영국 현지에서 했다. 자부심은 커졌지만, 국내 시장과는 멀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록을 지금의 팝 댄스 음악처럼 인기 장르로 자리잡게 하지 못 했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하드록은 왜 한국에 뿌리내리지 못했을까. 우리나라는 음악이 낱개로 팔린다. 음원차트도 앨범 차트가 아닌 싱글 차트가 성공의 척도가 된다. 앨범의 스토리를 짜고 모든 음악 작업을 손수 하는 록 밴드의 구성력과 음악성은 싱글 차트 순위에서는 좀처럼 드러나지가 않는다.
영국, 미국의 록 밴드들은 앨범의 구성과 스토리를 공연으로 풀어낸다. 공연이 입소문을 타면 앨범의 가치가 높아지고 판매량도 증가하는 구조다. 수익이 발생하고 비즈니스가 형성되니 록 시장이 오랫동안 사랑 받을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국내 록 밴드들은 그런 기반 없이 열정만 가지고 부딪히려고 하니 비주류 음악으로만 구분되고 겉돌게 된다. 11월 무려 CD 3장 분량의 앨범 ‘어 파이어 인 더 스카이’를 발매한 딥퍼플의 자신감이 나는 부럽다.
계속 투정을 부릴 수는 없다. 50대라, 디지털 음악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젊은이들의 음악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면서 시대에 맞는 록 음악을 선보이기 위해 연구 중이다. 언젠간 ‘편의점 만수르’가 아니라, 기타리스트 김도균으로 대중 앞에 설 날이 오겠지.
정리=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기타리스트 김도균의 구술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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