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뉴스 장식한 강자들의 횡포
성적 줄 세우기가 부적격자 양산
유통기한 지난 시험 경쟁 보완해야
올해 가장 주목받은 뉴스 중 하나는 ‘갑질’일 게다. 인터넷 포털에서 ‘갑질’이라는 단어를 쳤더니 최근 1년간 4만6,000건의 뉴스가 검색됐다. 아파트 부녀회가 자녀들을 가난한 애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막았다는 갑질은 애교 수준이다. 한 재벌3세는 술자리에 동석한 변호사들에게 “너희 아버지 뭐 하시냐”라며 행패를 부려 ‘다이아몬드수저’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금수저마저 갑질의 대상으로 전락시켰으니 틀린 얘기도 아니다. 직장 갑질은 일상 다반사다.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과 의료계에도 을의 분노가 넘쳐난다. 한 대학병원은 간호사들에게 선정적인 춤을 강요해 갑질 논란을 불렀다. 교수가 대학원생을, 간부가 부하직원을 성추행하고 괴롭히는 갑질 뉴스가 1년 내내 우리 사회를 뒤덮었다.
각기 의사와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두 대학교수에게서 한국사회 갑질의 뿌리를 추론해볼 수 있는 얘기를 들었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의사나 교사가 돼서는 안 될 학생이 많이 들어온다고 한탄했다. 의대와 교대에는 1등급 수재들이 몰린다. 이들이 치열한 시험 경쟁에서 승리했을지는 몰라도 의사나 교사가 되기에 적합한 인성을 갖춘 경우는 드물다.
예컨대 의사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다. 고도의 직업윤리와 소명의식이 요구된다. 환자를 가족처럼 대하며 헌신적으로 돌볼 자세가 돼 있어야 한다. 타인의 피와 뼈와 살을 늘 접하니 적성에도 맞아야 한다. 하지만 의사에 적합한 자질과 인성, 적성을 지닌 의대생을 찾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 성적에 맞춰 미래 수입을 보고 의대에 지원한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온전한 인간을 키워내는 역할을 하는 공익적인 직업이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교육을 천직으로 여겨야 한다. 그런데 성적 좋은 학생들이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교대를 간다. 이들에게서 교육에 대한 애정이나 헌신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국은 시험 공화국이다. 대학입시도, 취업도, 전문직 진출도 오로지 시험 경쟁이 좌우한다. 그 싸움에서 이기려면 남보다 오래 공부하고 잠을 적게 자야 한다. 한국 학생들 공부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고 수면시간이 가장 짧은 이유다. 성적 올리는 비법을 알려 주는 사교육도 필요하다. 그러니 부모 경제력이 위력을 발휘한다. 취업도 마찬가지다. 용돈받아 생활하며 취업 준비하는 학생과 알바로 학비를 벌어야 하는 학생의 시험 경쟁력이 같을 리 없다. 그러니 시험이 기회의 공정을 보장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시국가 구성원을 부자와 가난한 자, 중간계급으로 나눴다. 부자들은 복종을 모르고 지배할 줄만 안다. 교만해 무뢰한이 되기 쉽다. 시험 경쟁이라는 형식을 빌린 현대사회 부의 대물림도 다를 바 없다. 성적만 따지니 공부 잘하는 학생은 특권의식에 젖기 쉽다. 시험 경쟁에서 낙오한 아이들은 인생의 패배자인양 좌절하고 소외된다.
선진국 입시경쟁은 다르다. 영국은 의대생 정원의 3배수를 뽑아 한 학생당 1시간 넘게 인터뷰를 한다. 이 학생에게 6년 뒤 내 가족을 치료할 자질이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본다. 의사로서의 적성은 물론 인간성, 소통능력, 팀워크 등 다방면으로 검증한다. 의료 봉사활동 경험도 중요하다. “2년간 매주 양로원을 방문했고 방학 때마다 병원에서 실습을 했으며 열여섯 살 때 심폐소생술 자격증을 취득했다”(재영의사 박현미).
갑질의 뿌리는 성적만으로 줄 세우는 잘못된 교육에 있다. 시험 경쟁에서 승리하면 인격자요 능력자로 대우받는데 굳이 자질을 따져 진로를 고민할 이유가 없다. 의사나 교사가 되기에 적합한 인성과 적성 따위 무시하면 그만이다. 학생 한 명 한 명의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교육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 성장하는 교육의 기본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 존엄성을 무시하는 괴물들이 도처에서 갑질을 일삼는 배경이다. 교육이 국가의 기본이라면, 인력과 비용이 들더라도 인성과 자질을 함께 평가해 부적격자를 걸러내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유통기한이 지난 19세기 방식의 시험 경쟁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볼 때가 됐다.
고재학 논설위원 겸 지방자치연구소장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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