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 산재 인정 범위 확대
일용품 아니라 인정 안되지만
“당장 필요” 주장땐 단정 어려워
기준 애매모호 선긋기 쉽지 않아
사례별로 인정여부 논란 불가피
퇴근길 백화점에 들러 수백만원짜리 명품 핸드백을 구입한 근로자가 집에 걸어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면 산업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만약 이 근로자가 여분의 가방이 없어 다음 날 출근을 위해 구매했다고 주장한다면 산재로 인정받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내년부터 바뀌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따른 변화인데, 적지 않은 혼란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20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개정법에 따라 내년 1월 1일부터는 기존통근버스 외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ㆍ퇴근길 통상적인 경로에서 발생되는 사고도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다. 여기에 거주지와 취업장소(회사)를 오가는 일반적인 경로에서 벗어나더라도 일상생활 필요에 의한 것이라면, 이 행위를 위한 이동 경로에서 발생한 사고는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했다. 출퇴근 과정에서의 산재 인정 범위를 대폭 넓힌 것인데, 워낙 다양한 예외가 발생할 수 있어 사례별로 인정 여부를 두고 논란이 적지 않을 전망이다.
개정안에 따르면 출ㆍ퇴근길 일상생활 필요에 의해 산재로 인정하기로 한 6가지 행위는 ▦일용품 구입 ▦학교 또는 직업훈련기관에서의 교육ㆍ수강 ▦선거권이나 국민투표권 행사 ▦아동 또는 장애인의 보육ㆍ교육기관 등ㆍ하교 ▦치료목적의 진료 ▦의료기관 등에서 요양 중인 가족 간병 등이다. 이런 행위가 발생하는 장소가 아닌 ‘이동 경로상’에서 사고가 발생한 경우에 한해 산재를 인정한다. 퇴근길 대형마트 안에서 우유를 사다가 넘어진 것은 산재 인정이 되지 않지만, 마트를 나선 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넘어져 다친 것은 산재로 인정된다.
문제는 현재 마련된 기준이 모호해 어디까지 일상생활 필요에 의한 것인지 명확히 선을 긋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경우에 따라선 근로자의 ‘억지 주장’도 가능하다. 근로복지공단이 현재 개정중인 ‘출ㆍ퇴근 재해 업무처리지침’에 따르면 ‘일용품 구입’의 경우 퇴근길 백화점에 들러 명품가방을 구입하고 귀가하다가 다치는 경우는 재해로 인정 받을 수 없다. 핸드백은 당장 필요한 일용품으로 보기 어렵다는 취지다. 하지만 근로자가 “당장 필요에 의해 사야만 했다”라고 주장하면 섣불리 산재가 아니라고 단정하긴 쉽지 않다. 근로복지공단 산재보상국 관계자는 “사안에 따라 필요성, 긴급성이 다르기 때문에 명품백이어도 사례별로 따져 볼 필요는 있다”고 설명했다.
‘아동 등ㆍ하교’ 규정도 논란 소지가 다분하다. 현재 규정대로라면 학교와 학원 등 교육기관에 데려다 주는 행위는 인정 받을 수 있지만 개인과외를 위해 집이나 카페 등으로 이동하다 사고가 난 경우는 교육기관이 아닌 탓에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또 6시에 퇴근을 해서 서점이나 카페에서 1시간 가량 기다린 뒤 아이를 학원에서 픽업한 경우 출퇴근 산재로 볼 수 있을지 또한 다툼의 여지가 있다. 근로복지공단 관계자는 “개인과외 장소는 교육기관은 아니지만 이에 준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추후 검토가 필요하다”라며 “아이 픽업을 위해 기다린 경우 사회적 통념상 허용되는 수준인지 여부도 사례별로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제도 초기에는 도덕적 해이가 쉽게 일어날 수 있으며 이는 곧 기업의 보험료 납부액 증가와 공단의 기금 초과 지급 부담 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라며 “초반부터 꼼꼼한 조사를 통해 승인 기준을 다듬어 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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