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 위에 또 흰 눈이 내린다. 아침에 눈가래로 한 번 밀었는데, 금세 또 쌓이누나. 그래도 좋다. 서설(瑞雪) 아닌가. 앞집 어린 멍멍이도 눈길 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닌다. 덩달아 눈가래를 밀던 나도 신이 나서 어릴 때처럼 붉은 혀를 쏙 내밀어 함박눈을 받아먹어 본다. 혀끝이 시리다.
나는 장엄한 설경이 제대로 보고 싶어 털장화를 꺼내 신고 마을과 들이 한눈에 다 보이는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 덮인 산길엔 아직 새 발자국 하나 없다. 그리 높지 않은 동산 꼭대기에 올라가니, 전혀 딴 세상이 펼쳐져 있다. 아, 설국! 하늘하늘 내린 눈발이 세상을 평정했구나. 가장 여린 것이 강한 것들을 이겼구나. 가진 자들, 힘센 자들의 차별 때문에 가슴 깊이 은결 든 세상의 약자들도 오늘은 눈이 평정한 설국을 보며 위안과 치유를 얻겠구나.
미끄러운 언덕길을 조심조심 되짚어 내려오며 문득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성탄절이 다가오기 때문일까. 프랑스 소설가 미셀 뚜르니에의 ‘동방박사들’. 성경에 나오는 동방박사 이야기를 뚜르니에는 멋진 픽션으로 만들었다. 오늘 여기서 함께 나누고 싶은 건 세 동방박사 가운데 아프리카에 영토를 가진 메로에의 왕인 가스파르 이야기. 가스파르 왕은 측근인 점성술사의 권유로 꼬리 달린 특별한 혜성을 따라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가 구린내 나는 마구간에 태어난 아기 예수를 경배한다. 가스파르는 바로 유향을 바친 동방박사. 그는 마구간의 구유에 뉜 아기 예수를 만났을 때의 놀라운 광경을 이렇게 고백한다.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구유 위로 몸을 숙였을 때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곱슬곱슬한 머리칼과 앙증맞고 납작한 코를 지닌 새까만 아기, 간단히 말해서 내 나라의 아프리카 이들과 흡사한 아기였습니다.”
가스파르가 만난 예수는 자기 나라 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흑인이었다는 것. 요셉과 마리아는 분명 백인인데, 그들이 낳은 아기는 흑인이더라는 것. 그 동안 우리가 역사 속에서 만나온 예수는 금발의 백인. 그러나 가스파르는 자기가 본 아기 예수의 피부 빛깔이 새까만 것은 곧 자기에게 ‘사랑의 교훈’을 주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고, 따라서 자기는 그 뜻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구유의 아기는 아프리카의 동방박사 가스파르를 더욱 잘 맞이하기 위해 흑인이 되었습니다…이 귀감이 되는 모습은 이렇게 권유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눈으로 봐야 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존경해야 - ‘존경하다’는 단어는 본래 ‘두 번 바라보다’라는 뜻이다 - 합니다. 그리하면 ‘사랑’이란 이름을 가진 그 탁월한 능력에서 기쁨과 즐거움과 승화가 일어납니다.”
비록 픽션이지만, 뚜르니에는 살아 생전 예수가 보여준 종지(宗旨)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예수의 종지는 어떤 인간도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을 이루는 것. 하지만 오늘날 예수를 삶의 본보기로 삼는다는 이들 가운데는 피부 빛깔과 인종의 차이, 종교의 차이를 이유로 차별을 더 심화시키고 있다. 차별은 당연히 갈등과 분쟁을 낳을 수밖에 없다. 평화의 도시라 불리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 말함으로써 야기된 갈등과 분쟁을 보며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오래 전 선각자가 일깨워주고, 그 정신의 깊이에 접속한 작가가 보여준 지혜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깨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무엇이 이 인류의 잠을 깨워줄 수 있을까. 하룻밤 새 내린 부드러운 눈이 강고한 세상을 평정하듯 하늘이나 할 수 있는 일일까. 나는 아직도 함박눈을 펄펄 날리는 광활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은 묵상에 잠긴다.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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