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박재현(25)씨는 ‘평창 롱패딩’을 구입한 ‘금손’이다. 이틀 동안 발품을 팔아 품절 대란에서 승리했다. 박씨는 지난달 14일 백화점에 갔을 땐 평창 롱패딩을 손에 쥐지 못했다. 그가 찾던 검은색 스몰 사이즈의 롱패딩이 동이 난 탓이다. 다음날 소량으로 원하는 옷이 들어온다는 걸 확인한 그는 15일 백화점 개장 시간인 오전 10시 30분에 맞춰 다시 매장을 찾았다. 제품이 입고는 됐는데 검수 중이라 사려면 다시 기다려야 했다. 박씨는 90여 분간 줄을 선 뒤에야 옷을 간신히 구했다.
평창 롱패딩 등 내셔널 굿즈(National GoodsㆍNG)에 빠진 이들 중엔 20~30대가 적지 않다. 젊은 ‘NG족’의 등장이다. 1990년대 이전에 청춘을 보낸 세대에겐 NG에 빠진 젊은이들이 낯설기만 하다. 나라에서 큰 이벤트를 맞아 기획하거나 제작한 상품이라면 미간부터 찌푸리며 멀리하기 바빴던 자신들과 달라서다. 고등학생 때 88올림픽을 치른 직장인 박민수(44)씨는 “단순히 촌스럽고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 나라에서 기획한 문화 상품을 입고 다닌다는 게 우리 때는 국가의 선전도구로 활용되거나 앞장 선다는 느낌이 들어 꺼렸던 것 같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88올림픽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처절했던 전두환 정부 때 추진돼 군사 정부의 유산을 이어 받은 노태우 정부 시절 개최됐다. 두 정부에 대한 반발이 국가 기획 문화 상품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으로 작용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NG에 대한 인식이 이전 세대와 확연히 다르다. NG에 대한 반감뿐 아니라 거부감도 크게 없다. 본지 20대 인턴 기자를 대상으로 NG에 대한 인식 조사를 해보니 15명 중 14명이 국가에서 기획했다고 해서 구매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들 중 ‘민간에서 제작한 대중 상품과 달라 NG가 오히려 좋다’고 답한 이도 있다. 촌스럽다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해 사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 이는 1명뿐이었다.
한창 유행에 민감한 청춘이 NG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사회적 변화와 관계가 깊다. NG 열풍의 중심에 선 이들은 광장에서의 시민 혁명으로 새로운 민주주의의 탄생을 지켜 본 ‘촛불 세대’다. 참여하면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경험했다. 수저계급론이 남발하고 이 나라를 ‘지옥의 땅’이라 부르며 자조가 넘쳤던 시기에 겪은 격변이었다. 세월호 참사와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정부에 대한 혐오도 박근혜 정부 퇴진으로 잠시 누그러졌다. 이 과정에서 젊은 촛불 세대가 확인한 건 높아진 국격에 대한 자부심이다.
나라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에 가까운 애국심과 개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와는 결이 다르다. 믿음을 바탕으로 한 국가에 대한 자부심 회복이 NG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없애는 계기가 됐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장은 “시민이 나서 부정했던 정권을 교체하면서 국격을 올렸다는 자부심이 생겼다고 본다”며 “해외에서 각광 받는 K팝 등 한류 붐도 NG족에 문화적 자부심을 심어주는 통로 역할을 꾸준히 해왔다”고 봤다.
NG는 연대의 상징이기도 하다. 국가로부터 정체성을 규정 받은 기성세대와 NG족은 정반대다. 어디에서도 정체성을 부여하지 않으며, 공동체 의식을 확인할 곳도 찾기 어렵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NG족에게 NG는 어딘가의 일원임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라고 분석했다.
경제 위기가 계속되자 젊은이들은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 불렀다. 국가에 저주를 퍼붓던 청춘은 어떻게 NG족이 될 수 있었을까.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헬조선’은 무정부주의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청춘들의 나라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반작용”이라고 설명한다.
젊은 NG족의 등장은 문화계 흐름까지 바꿔놓고 있다. 요즘 방송가에선 외국인의 한국 체험 프로그램이 인기다. 케이블채널 MBC 에브리원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를 필두로 올리브 ‘서울메이트’ 등 유사 프로그램이 잇따라 제작되고 있다. 2014년 첫 방송 돼 외국인의 눈으로 한국의 문제점을 들춰 인기를 끌었던 JTBC ‘비정상회담’과는 상반되는 현상이다.
이런 유행이 ‘국뽕’(지나친 국가주의)으로 비칠 수 있지만, 한국의 가치를 곱씹는 외국인에 관심을 쏟는 데는 그간 우리가 무시했던 한국의 가치를 찾으려는 몸부림에서 비롯됐다고도 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내 기념품 매장에선 한글을 주요 디자인으로 한 숄더백과 윤동주(1917~1945) 시인의 ‘별헤는 밤’이 새겨진 유리컵 등이 인기다. 한글 등이 NG족에 때아닌 주목을 받게 된 것도 청년의 나라에 대한 자부심 회복과 무관하지 않다. NG족인 대학생 김슬기(23)씨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신사임당(1504~1551)의 ‘초충도’가 프린트 된 작은 지갑을 미국에서 온 외국인 교환학생에 선물했다. 젊은 ‘NG족’은 한국의 문화적 유산을 자신의 패션으로 전시하고, 밖에 소개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요즘 NG엔 그 흔한 태극기도 찾아 볼 수 없다. 평창 롱패딩엔 평창의 로고가 안감에 박혀 있다. 윤동주 유리컵과 신사임당 초충도 지갑 등에도 인물 사진은 없다. 과한 역사적 의미를 덜어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20~30세대의 입맛에 맞다. 평창 롱패딩엔 슬로건이자 하나된 열정이란 뜻의 ‘Passion Connected’란 문구만 뒤에 새겨져 있다. 디자인 보다 맥락을 중시하는 이들엔 ‘패션 커넥티드’는 청춘의 언어로 읽혀 공감대를 형성한다. 1971년 출시된 ‘국민 과자’인 새우깡의 이야기를 티셔츠에 담아 화제가 된 것과 비슷하다. NG족은 NG를 구매하며 ‘작은 사치’를 즐긴다. 경제적인 문제로 집 장만 같은 큰 소비를 포기한 대신 일상의 소소한 사치로 즐거움을 느끼려는 행위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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