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 연합과 중국 사이 끼인 처지에서
미중 사이 적절한 균형점 찾기 쉽잖아
비민주적 패권국가라는 실체 인식해야
지난주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이 있었는데, 논란이 이어졌다. 저자세 외교라는 비판이 ‘국빈 혼밥’이라는 패러디와 엉켰다. 일어난 사건들이 우발적 해프닝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사람들이 다 안다.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중국이 한국을 길들이려 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러나 사드 배치를 둘러싼 갈등조차 단순히 군사무기가 위협이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에서 비롯한 게 아니다. 중국이 아시아에서 미국의 지배력을 밀어내고 패권국가가 되려는 장기적 전략이 모든 일들의 핵심이다. 국제 관계에서 미ㆍ일의 연합과 중국이 부딪치는 형국이고, 한국은 그 사이에 지리정치학적으로 ‘콱’ 끼어있다.
그래서 중국문제는 정치적 대결을 촉발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보수는 미·중 사이에서 미국을 선택해야 하며, 한국이 미·일과 연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는 기간에 일본을 방문한 홍준표 한국당 대표는 한·미·일의 핵 연합을 강조하면서 아베에게 머리를 숙였다. 반면에, 정부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관점을 강조한다. 문제는 균형 잡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중국 쪽으로 조금 더 가서 물리적으로 균형을 잡기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정부도 이 고민을 피할 수 없다. 문 대통령은 중국에서 세 번씩이나 한국과 중국이 “운명적 동반자”임을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외교적 용어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운명’을 강조한 것은 한중 관계가 그만큼 뗄 수 없다는 사실을 부각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세로 보이는 외교를 무릅썼을 것이다. 지난 보수 정권들은 모호하게 ‘전략적 동반자’라는 점을 내세웠는데, 이젠 더 이상 그런 전략적 모호성조차 통하지 않는 상황이다. 중국의 현실적 패권을 인정해야 하고 일정 부분 협력해야 할 수밖에 없는 국가 지도자는 그런 어려운 균형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운명적 동반자 관계 뒤에는 이면이 있다. 미국도 때로는 껄끄러운 나라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민주적인 규칙을 지키거나 최소한 그런 시늉이라도 한다. 이 점에선 미국이 더 믿을 만하다. 문제는, 상대적으로 믿기 어렵고 협력하기 어려운 중국에 대해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정부의 저자세 외교가 한중 사이의 갈등을 잠깐 무마하거나 연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저자세 외교가 장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이것이 핵심이다.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거의 유일하게 패권을 차지했었던 중국은 한동안 중화주의에서 벗어나기 힘들 듯하다. 오랜 역사에서 중국이 한국에게 동반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운명적으로 갈등 유발자였다. 한중이 문화적 뿌리를 공유한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껄끄러운 패권 국가라는 사실이 가려지지는 않는다.
기술력에서 한국이 중국에 대해 한동안 누렸던 비교 우위가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심각하고 불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뿌리 깊은 불안과 경계를 퍼뜨릴 일은 아닐 터인데도, 그런 일이 생기고 있다. 중국의 대국주의에 시달린 역사가 뿌리 깊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한에 큰 일이 터지면 중국군이 북핵을 빌미로 평양 근처까지 진입하고 또 점령할 수 있다는 보도는 군사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북한 지역을 점령? 자칫하면 중국은 운명적 적대자가 될 것이다. 저자세 외교를 무릅쓰면서 정부가 스스로를 ‘작은 나라’라고 부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한국은 더 이상 군사적 모욕을 받아들여도 될 ‘작은 나라’는 결코 아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이게 무슨 나라냐’라는 말이 다시 나올 것이다.
너무 국가주의에 쏠리거나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그래, 너무 그럴 필요는 없다. 최종적으로 그리고 최소한, 삶의 질이 좋고 사회 시스템이 민주적이라면, 이웃나라의 오만이 개인의 삶에 무슨 큰 문제인가. 그러나 운명적 동반자가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적대자로 들이닥친다면?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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