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서울 항공편을 이용한 것도 처음, 목적지인 코타키나발루도 처음이었다. 그곳에서 브루나이를 렌터카로 왕복한 것도 처음, 한 나라에 입국하는데 여권에 8번의 출입국 스탬프를 찍은 경험 역시 처음이었다. 이 모든 ‘처음’에 흥분보다 굴욕의 감정이 지배했다.
5개월 전 에어서울의 코타키나발루행 특가 항공편을 발견한 것이 발단이었다. 불확실한 여러 업무 일정에 망설였지만, 가격 앞에 서슴없이 승복했다. 인천에서 3,732km 떨어진 그곳까지 왕복 17만원 언저리, 뒤로 자빠져 코가 깨져도 좋을 가격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탑승 취소의 위기를 헤치고 겨우 기내에 골인했다. 오후 8시, 배가 몹시 고팠다.
에어서울은 무료 기내식이 없다(라는 걸 몰랐고, 설마 생각하지도 못했다). 미리 ‘오더’하지 않으면 식사 자체가 불가하다. 대신 간단한 요기 거리로 컵라면을 판매한다. 여러 곳에서 라면 냄새가 솔솔 풍기는데, 이게 참 죽을 맛이었다. 늦은 저녁에 식사 없이 버티던 우리는 어느 순간 심심풀이 과자까지 주문하며 카드를 긁고 있었다.
새벽 2시경, 공항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동남아시아에서 느껴지는 후덥지근한 공기가 마중 나왔다. ‘아, 코타키나발루다’라고 하기엔 그저 깜깜했다. 우린 오늘 브루나이로 넘어갈 것이다. 공항 내 렌터카 업체의 영업시간이 오전 8시부터이니, 앞으로 6시간쯤 남았다. 우린 얼마 남지 않은 하룻밤 숙박비를 치르는 대신 공항 노숙을 결심했다. 20대의 젊음은 없었으나 오기는 여전히 건재했다.
코타키나발루에서 렌터카 여행을 결심한 계기는 순전히 브루나이 탓이었다. 브루나이는 1인당 자가용 보유대수가 0.48대로(이렇게 평균치를 높인 건 술탄과 술탄 동생일 거다. 술탄은 5,000여대, 그의 동생은 2,000여대의 차를 보유하고 있다고 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자동차세도, 기름값도 현저히 낮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외곽으로 이동하다가는 미아가 되기 일쑤요, 시내 대중교통 이용에도 인내가 필수였다. 고로 2명의 여행자가 1대의 렌터카를 이용하는 건 으레 정당해 보였다. 계산기도 꼼꼼하게 두들겼다. 코타키나발루와 브루나이 사이 비행기 값과 ‘아무도 안가는 곳 가기’ 전문인 우리가 얻을 자유의 가격을 따졌을 때, 렌터카는 사치가 아닌 기본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12월 2일은 무함마드(prophet Muhammad, 이슬람교 창시자) 생일이어서 공휴일이라는 정보도 얻었다. 이는 곧 거대한 ‘축제’가 펼쳐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이어졌다. 어떤 미세한 떨림이 가슴 한구석을 흔들었다.
인터넷으로 예약한 렌터카 업체는 KMT Global Rent A Car다. ‘글로벌’이라는 이름답게 말레이시아 차로 브루나이 국경을 넘어도 문제 없다는 업체였다. 국경은 ‘넘사벽’인 걸 알기에, 이 점만은 확실히 했다. 이메일로 옥신각신 예약 관련 문의를 주고 받았는데 뜻밖에도 응답률은 100%, 하지만 답변에는 3~4일이 걸렸다.(어쩌면 이때 말레이시아의 인터넷 속도를 의심해 봤어야 했다). 공항에서 차를 인수한 후 시내 사무실로 반납하는 조건으로 1주일 사용을 예약했고, 브루나이 일정 후 남은 이틀간은 코타키나발루 외곽을 방황하기로 했다. 길어봤자 2박3일로 잡은 브루나이 일정은 ‘그 분’의 생일로 인해 4박5일로 늘어났고, 그에 따라 두 나라 사이의 어떤 변방에서 예상치 못한 하룻밤을 지내리란 일정도 예고되어 있었다. 가끔 우린 너무 긍정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갈 때나 올 때나 신비로울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다지 끌리지 않는 소도시를 벗어나면 오일 팜트리만이 부스스 떨고 있었다. 야외 취침을 하기엔 홍수로 떠내려갈 우려가 있는 우기이기도 했다.
공항의 아침은 언제나 흥미롭다. 이른 항공편을 기다리는 현지인 틈에 끼어 에스프레소와 진한 초콜릿 머핀으로 시간을 때웠다. 공항은 노숙하기엔 꽤 쾌적한 편이다. 화장실 근방에 팔걸이가 없는 의자 4개가 연속으로 붙어 기본 매트리스(!)는 갖췄다. ‘안락’이 빠졌을 뿐, 침낭이나 가벼운 담요가 있다면 숙면도 가능해 보인다. 24시간 여는 편의점과 패스트푸드점이 있어 굶을 일도 없고, 안마 의자는 3링깃(약800원)이면 9분간 온몸을 구석구석 마사지한다.
어김없이 해는 뜨고 구루병을 방지한다는 비타민A를 섭취하기 위해 문을 나섰다. 여전히 ‘아, 코타키나발루다!’란 감상은 없다. 겨울 옷을 깊이 넣어두고 슬리브리스와 핫팬츠 차림을 한 뒤 렌터카 업체로 갔다. 한국에서 미리 한 인터넷 예약은 접수돼 있지 않았다. 본사와의 전화 각축전 후 11월 28일부터 12월 5일까지, 오전 10시 반납으로 추가 요금 없이(오전 8시였으니, 엄밀히 따지면 2시간 초과다) 1주일 할인 금액으로 지불했다. 보증금은 카드로 잡아두지 않고 무조건 현찰 박치기다. 500링깃(13만5,000원)을 앗아간 렌터카 업체 직원은 사고가 나면 2,000링깃을 물어야 한다며 겁을 줬다. 불시에 국제 빚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가 갈 브루나이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로 양분된 보르네오 섬에서 말레이시아 땅에 찰거머리처럼 붙은 나라다. 나라 모양이 W자 형태로 된 까닭에, 목적지인 수도 반다르세리베가완에 닿으려면 말레이시아에서 브루나이로 진입한 후 다시 말레이시아 땅을 거쳐 브루나이 국경을 건너야 한다. 국경을 여러 번 넘지 않을 요량이라면 W지형의 하단 꼭지점을 돌아야 하는데, 그런 멍청한 일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의문 하나가 남는다. 국경선을 3차례 넘으면 총 6번 출입국 스탬프가 찍힐 텐데, 대체 왜 8번일까?
드디어 도로 주행을 시작했다. 기존 정보에 따르면 렌터카 업체에서 시속 100km가 넘으면 시동이 꺼진다고 주의를 준다는데, 우린 듣지 못했다. 실제 120km까지 밟았으나 그런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약 320km, 6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인데, 일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공항으로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온 상태에서 차량의 USB 충전기가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휴대폰의 잔여 배터리는 10% 상태로 헉헉대고 있었다. 미리 다운받은 오프라인 맵은 일할 기회조차 잃었다. 오로지 세밀하지 못한 동남아시아 지도와 동물적 감각에 의지해 달릴 수 밖에 없는 상황, 과연 무사히 브루나이로 넘어갈 수 있을까? 길은 때론 굽이굽이, 때론 길게 혀를 빼며 우리를 맞고 있었다.
강미승 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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