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상환 미뤄지는 ‘기한이익’
상실한 채권 10조 중 9조가
연체 2개월 이내에 이뤄져
이후 대출잔액에 연체금리 적용
지연배상금 급증하는 구조
“대출자에 불리… 개선 필요” 지적
돈을 빌려줄 때와 돌려받을 때 180도 달라지는 금융사들의 태도를 정당화해주는 이른바 ‘기한이익상실’ 제도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원금이든 이자든 단 두 달 만 밀려도 순식간에 연체배상금이 많게는 수십배씩 뛰는 ‘너무 가혹한’ 제도라는 비판에 금융사들은 “신용사회에서 연체자에게 페널티(벌칙)를 부과하는 건 당연한 조치”라고 맞선다. 하지만 지금의 제도가 채무상환 유도보다 금융사의 수익 보전용에 가깝다는 말이 나올 만큼 금융권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4일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금융감독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10월말 현재 은행, 카드, 캐피탈, 상호금융, 저축은행, 대부업 등 6개 금융업권이 보유한 ‘기한이익상실’ 채권은 10조5,596억원에 달한다.
기한이익이란 채무자(대출고객)가 일정 기한(만기)까지 채권자(금융사)에게 대출금을 갚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말한다. 통상 대출 계약을 맺으면 생기는데, 대출자가 대출 원리금을 연체할 경우 이 기한이익이 상실돼 금융사는 만기 전에 대출금을 회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금감원 자료에 따르면, 전체 기한이익상실 채권 가운데 무려 87%(9조1,867억원)는 연체 후 2개월 안에 기한이익을 상실한 채권으로 나타났다. 쉽게 말해 연체자 10명 중 9명은 단 두 번의 연체로 기한이익 상실 통보를 받은 셈이다.
금융사는 대출금을 연체한 대출자에게 배상금을 요구하는데, 문제는 지금의 배상금 산정 체계가 연체자에게 가혹할 만큼 불리하게 설계돼 있다는 데 있다. 기한이익이 남아 있는 연체 2개월차까지는 매달 내는 이자에 연체금리(대출금리+연체가산금리 6~7%)를 매겨 배상금을 구한다. 하지만 기한이익 상실 뒤부터는 이자가 아닌 대출잔액에 연체금리가 매겨져 배상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구조다.
특히 평소 이자만 갚는 거치식 대출자는 부담이 훨씬 커진다. 예컨대 거치식 주택담보대출 3억5,000만원(연 3.25%)에 대한 이자를 두 달 동안 내지 못해 기한이익을 상실하면 대출잔액(3억5,000만원)에 연체 가산금리(3.25+7=10.25%)가 매겨져 갚아야 할 배상금이 기한이익 상실 전 약 9만7,000원에서 297만원으로 30배나 뛴다.
이를 갚지 못하면 은행은 경매에 넘겨 대출을 회수한다. 경매만은 피하고 싶다 해도 돈을 갚기는 결코 쉽지 않다. 은행에 갚는 돈은 배상금, 이자, 원금의 순서로 충당돼 배상금을 해결하기 전엔 원금이 깎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연체금리 수준(은행권 최대 15%)도 미국(3~6%), 영국(2%), 프랑스(3%) 등 선진국보다 훨씬 높다. 2금융권은 27.9%에 달한다.
이런 현실에 대해 한 시중은행 여신담당 임원은 “모범규준에 기한이익상실 기준을 연체 1~2개월로 규정한 만큼 금융사로선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밖에 없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제도 개선 여지가 적지 않다고 본다. 김영일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채무상환을 독려하는 차원인 외국의 연체이자 부과방식과 달리 우리는 금융사에게 손실을 웃도는 수익을 보장하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고 꼬집었다.
금융당국도 현재 개선안을 고심 중이다. 금융위원회는 현재 주요국의 기한이익 상실 적용 기간을 조사하고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선진국보다 높은 연체배상금 수준 등 제도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제윤경 의원은 “단 두 번의 연체로 채무자에게 가혹한 상환 스케줄을 강요하는 건 문제”라며 “채무 상환을 돕는 차원에서 기한이익 상실 기간을 2개월에서 6개월로 연장하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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