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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숲에도 눈이 내린다

입력
2017.12.14 14:1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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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을 떨군 나목(裸木)들 키만큼 산이 낮아졌다. 무성한 잎들이 무장해제하자 감추어졌던 본래의 산 등고선이 ‘나 여기 있다’고 손짓하며 민낯을 드러낸다. 우선 반갑고 시원하다. 푹신한 낙엽을 만든 나무들도 홀쭉하게 보인다. 1백 일 동안 묵언수행에 들어가는 조금은 비장한 표정이다. 겨울의 휴지기(休止期)를 보낼 준비가 다 된 것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다. 낮아진 큰 산이 포근하게 안기는 듯 가깝다. 지난여름 사나운 녹색의 위세는 간 곳 없다. 숲의 신선한 겨울풍경이다. 나무들 사이로 열린 넓은 공간이 끝 간 데 없이 광활하게 다가온다. 적막할 뿐이다. 동면에 들어간 산짐승들도 갑자기 궁금하다. 산새소리도 끊겼다. 태곳적부터 불던 원시의 바람만 반긴다. 겨울 한철까지 부지런을 떠는 사람만이 자연에 역행하며 홀로 서 있다. 눈 우산을 쓴 소나무, 잣나무, 주목들은 겨울을 지키는 초병(哨兵)처럼 변하지 않고 더욱 푸르르다.

숲에도 눈이 내린다. 도회지의 눈처럼 계엄령이 내리듯 몰래 오지 않고 자연의 의식(儀式)처럼 자연스럽다. 이곳에서는 폭설도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 해납백천(海納百川)하는 바다같이 모든 것을 품어 주는 산들이 있기 때문이다. 산들이 하얀 고깔을 썼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제국의 통일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눈 이불을 덮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 계곡을 감추고 바위까지 눈으로 덮은 산등성이도 부드러운 곡선을 뽐낸다. 설원(雪原)에 부딪혀 꺾인 햇살이 눈을 찌른다. 애지중지 기르는 자작나무들의 하얀 몸통에 반사된 빛인지도 모른다.

그 빛들은 몇 년 전 설날에 바이칼 호수를 찾을 때 경험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떠난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사흘 동안 달려온 이르쿠츠크 역의 온도계는 영하 35도를 가리켰다. 기차가 삶을 느리게 살라고 하지 않아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 눈 덮인 자작나무 숲과 시베리아의 달빛에 젖었다. 바이칼 호수는 하얀 산까지 아우른 절대 고독에 안긴 원시의 설국(雪國) 그 자체였다. 가없는 빙판에 반사되는 별들의 폭포도 금방 얼어붙었다.

그때의 데자뷔처럼 수목원의 두껍게 얼음으로 덮인 넓은 호수 위를 거닌다.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겨울의 마법이다. 여름날 물의 제국이었던 이곳의 빗장이 쉽게 열렸다. 발밑에 잠든 수련 꽃들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겨울잠을 자는 금잉어들이 깰까 봐 조심조심 걷는다. 수목원의 또 다른 모습이 앵글에 담긴다. 호수 한가운데 서서 주변 나무들과 문인석들의 열병을 받는다. 시각 교정은 쌓일수록 더욱 입체적이 된다. 드론을 띄워 비싼 비용으로 찍었던 영상보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지금 풍경이 훨씬 마음에 와 닿는다. 호숫가에 방한비닐을 두껍게 뒤집어 쓴 배롱나무들에게 인사를 전한다. 한두 해만 더 이런 고행을 하면 겨울바람에 얼어 죽지 않고 이 자리에 뿌리를 내려 한여름 위대한 붉은 꽃을 피울 것이라고 격려한다. 남쪽 고향에서 가져오고 싶었던 배롱나무 꽃그늘 숲의 꿈을 여기에 이루겠다는 나의 욕심을 들키지 않았으면 싶다.

도회지의 눈들은 잠시라도 더러운 탐욕까지 덮어야 한다지만 숲에서는 깨끗한 자연 그대로 쌓이면 된다. 어쩌면 눈빛에 묻힌 하얀 산새가 지나갔는지 모른다. 그리고 다시 혼자다. 오탁번 시인의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를 여기에 초대해야 한다.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 행인들의 순수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 가고/ 숲의 순수는 행인에게로 오는/ 이전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세계가 운반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비상(飛翔) 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조상호 나남출판ㆍ나남수목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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