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국가에 근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국민의 근로권은 단순한 도의적 권리가 아니다”, “근로권은 사권이 아니라 공권이며, 그 근본정신은 근로 의사가 있는 사람에게 국가가 일자리를 제공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를 세우는 기본으로 삼는 것이다” 1948년 6월 26일, 제헌의회 제2차 헌법독회의 논의 내용이다.
일자리가 법 영역에 들어온 것은 17세기 전후라는 게 일반적 견해다. 1601년 영국은 급증한 도시빈민 구제를 위해 구빈법을 제정했는데, 여기서 근로권은 구제받을 권리였다. 이후 프랑스 헌법은 근로권을 자유권적 기본권으로 규정하였고, 다시 산업혁명과 사회주의 확산을 거치면서 독일 바이마르 헌법에 이르러 근로권은 사회권적 기본권으로 규정된다. 일자리에 대한 법의 정의가 이렇게 변화한 것은 법이 현실, 즉 사회 변화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법이 단순히 사회현실을 반영한다는 것만으로는 잘 설명하기 어렵다. 제도로서의 법은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이상을 지향한다. 17세기 이후 노동을 하나의 권리로 받아들인 이래 법의 배경과 지향점은 천부인권사상과 자연법사상,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엄이었다. 그런데 자유, 평등, 인간존엄과 같은 지향과 현실 사이에 간격이 없을 수 없다. 그 간격이 너무 커서, 법의 이상이 점점 요원해지고 현실에서는 법의 경직된 통제만 느껴질 때 사회에 위기가 닥칠 수 있다.
일자리의 시대다. 우리 사회가, 현실이 일자리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국정 최우선 과제는 ‘일자리 만들기’가 되었고 국민권익위원회도 일자리에 주목하고 있다. 부패방지 및 국민고충민원을 처리하고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는 권익위는 법의 경직에서 생긴 사각지대를 비추어, 법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는 옴부즈만 역할로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다. 예컨대 경직된 인허가 규정으로 인한 공장, 물류센터 신축의 걸림돌을 제거하여 연간 수천 명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제도의 미비를 살펴 사각지대에 방치된 스타트업 기업에 자금지원 물꼬를 터 혁신성장의 기반을 마련,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게 한다.
더 나아가 직장 안전관리, 직업능력 개발 훈련, 장애인 의무고용 등과 관련된 제도 개선도 이상적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다. 이는 법이 일자리 제공을 규정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권리,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교육을 받을 권리, 신체적 조건과 무관하게 일할 권리 등을 지향하도록 우리가 법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법이 정의해 온 일자리의 새로운 모습에 대해 논의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노동을 권리로 인식하게 된 이래 인간의 존엄성은 생명공학, 인공지능, 로봇, 사물인터넷 등 최첨단 기술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 앞에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세계화, 저출산ㆍ고령화 같은 이슈에 따른 노동시장의 구조변화는 이미 현재진행형이다.
우리 시대의 인간다운 삶은 일거리 보장만으로는 담보하기 어렵다. 일자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법의 정의도 바뀌어야 한다. 역시 지향점은 인간의 존엄성이고, 그 합의의 실마리는 법 안에 있을 것이다.
최근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법’, ‘인류 전체의 법’, ‘자연과도 함께 할 수 있는 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물질만능과 무한경쟁, 속도에 치우친 우리 시대의 저울추를 정신과 상생, 지속가능성으로 옮기려는 노력이다. 그렇다면 인간다운 삶을 위한 일자리, 인류 전체가 공감할 수 있는 일자리, 자연과도 함께할 수 있는 일자리는 어떤 모습일까? 인공지능이나 로봇산업의 시장가치에만 주목하거나 이들 산업으로 인간이 결국 일자리를 잃게 되리라는 식의 도구주의적 혹은 결과주의적 사고로는 이런 물음에 다가갈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떤 사회에서 살고자 하는가?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하는 법과 일자리에 대한 대화를 제안한다.
박은정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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