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러시아의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출전을 금지했다. 어느정도 예상했던 일이지만 현실로 나타나면서 러시아를 비롯해 동계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줬다.
러시아 출전 금지의 계기는 광범위한 도핑 스캔들이었다. 지난해 5월 러시아반도핑기구(RUSADA) 산하 모스크바 실험실 소장이었던 그레고리 로드첸코프 박사가 뉴욕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러시아 선수들에게 조직적으로 금지약물을 투여했다고 폭로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후 캐나다 법학자 리처드 맥라렌이 이끄는 세계반도핑기구(WADA) 조사위원회는 지난해 7월 러시아가 2011∼2015년에 30개 종목에서 선수 1,000명의 도핑 결과를 조작했다고 발표했다. 특히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에 출전한 러시아 선수 28명의 도핑 결과가 조작됐다고 적시했다. 이에 IOC 징계위원회는 소치 올림픽에 나선 러시아 선수 25명의 성적과 기록을 삭제하고 메달 11개를 박탈했으며 문제가 된 선수들을 올림픽에서 영구 추방했다.
러시아 도핑스캔들의 문제는 선수들의 부정을 엄정하게 막아야 할 반도핑 센터가 오히려 수십년간 선수들의 부정을 도왔다는 점이다. 이는 곧 러시아 정부의 조직적인 개입을 의미한다. 결국 정부가 나서서 공정한 경쟁이라는 스포츠 정신 자체를 뒤흔든 셈이었다.
그런데 이런 역대급 사건의 한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뛰어든 미국의 영화 감독이 있다. 아마추어 사이클 선수이자 영화 제작자인 브라이언 포겔이다. 그는 다큐멘터리 ‘이카로스’에 로드첸코프 박사가 러시아를 탈출해 미국으로 건너와 러시아의 정부지원 도핑 시스템을 폭로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담았다.
약물 투여 실험으로 반도핑 시스템 허점 고발하려 했는데…
포겔 감독은 처음부터 이런 다큐멘터리를 만들 계획은 아니었다. 그는 미국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금지 약물 투여를 자백했던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이 500번의 약물 검사에서 단 한 번도 적발되지 않았던 점을 보고 스포츠 세계에서 반도핑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봤다.
아마추어 사이클 선수였던 그는 스스로에게 금지약물을 투여해 신체 능력을 향상시킨 후 약물 검사에 적발되지 않고 경기에 출전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보여줘 반도핑 시스템의 유명 무실함을 고발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포겔은 약물 검사 통과를 위해 로드첸코프 박사와 접촉해 조언을 구했다.
반도핑센터 소장이었던 로드첸코프 박사는 약물 검사에 적발되지 않는 법도 잘 아는 전문가였다. 그는 포겔 감독에게 투여해야 하는 약물의 종류와 시기, 약물 중단 시점을 세세히 알려줬다. 모스크바 실험실로 포겔 감독을 초대해 둘러보게 했다. 이 과정에서 포겔 감독은 러시아의 조직적인 약물 검사 조작을 알게 됐다.
이 와중에 2014년 12월 러시아 선수들이 집단적인 도핑 사기에 연루됐다는 다큐멘터리가 독일에서 방영됐다. IOC와 WADA가 발칵 뒤집힌 가운데 로드첸코프 박사가 조작의 배후로 지목됐다.
러시아 반도핑센터 관계자들 의문의 죽음 맞아
러시아가 도핑 지원 의혹을 받으면서 모스크바 실험실이 폐쇄되고 로드첸코프 박사도 소장직에서 물러났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포겔 감독에게 미국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2015년 11월 로드첸코프 박사는 아내와 자녀를 모스크바에 남겨둔 채 홀로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망명했다.
이후 로드첸코프 박사와 포겔 감독은 뉴욕타임스와 인터뷰를 갖기 전까지 약 6개월간 극도의 긴장 속에서 보냈다. 지난해 2월 RUSADA의 집행위원장을 지낸 뱌체슬라프 시녜프와 RUSADA 집행이사였던 니키타 카마예프가 잇따라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사망하면서 정부가 뒤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다.
로드첸코프, 러시아의 전국적인 ‘도핑 지원 시스템’ 폭로
미국에서 로드첸코프 박사는 “러시아는 약물 검사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전국적인 시스템이 존재한다”고 폭로했다. 포겔 감독과 인터뷰에서 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 가운데 30명, 2012년 런던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절반이 금지약물을 복용했다”며 “푸틴 대통령이 알고 있는 정부 지원 프로그램”이라고 밝혔다. 정부 지원 프로그램은 로드첸코프 박사가 프로그램 진행 사항을 유리 나고르니코프 체육부 차관에게 보고하면 다시 비탈리 뭇코 체육부 장관을 거쳐 푸틴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시스템이었다.
핵폭탄 같은 폭로을 들은 포겔 감독은 고민에 빠졌다. 포겔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사실을 영화로 만들면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고 증명하라고 했을 것”이라며 “유일한 길은 언론에게 알리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현재 로드첸코프 박사는 미국의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통해 신변 보호를 받고 있다. 러시아 모스크바 지방 법원은 지난 9월 로드첸코프 박사의 구속 영장을 발부했다. IOC가 러시아의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참가 금지를 선언한 6일 로드첸코프 박사는 변호인을 통해 “푸틴 정부가 가족들에게도 보복할까봐 두렵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포겔 감독, “로드첸코프는 러시아의 ‘에드워드 스노든’”
지난해 5월 로드첸코프 박사의 인터뷰가 뉴욕타임스에 나온 뒤 러시아 도핑 스캔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다. 포겔 감독은 로드첸코프 박사를 대리해 WADA와 IOC의 수사에 적극 협조했다. 그는 로드첸코프 박사를 불신하는 WADA와 IOC에 “로드첸코프 박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진실을 말한 러시아의 에드워드 스노든”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도핑 지원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도핑 의혹을 “변절자의 모략"이라고 맹비난했다. 이후 나고르니코프 차관은 사임했으나 뭇코 장관은 부총리가 됐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