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7일 타밀족 순교자의 날
정부탄압에 그동안 숨죽인 추모
올해는 반군묘지ㆍ학살현장 등
곳곳서 모여 들불처럼 추모 물결
반군 출신 인사도 대범하게 출현
지난달 22일 스리랑카 최북단 자프나 반도의 자프나대학에 기념비 하나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랬다. “오 그대여, 당신은 소중한 목숨을 바쳐 이 나라 자유의 동을 트게 했습니다.” 여기서 ‘그대’는 지금은 전멸한 타밀반군조직 타밀엘람해방타이거(LTTE, 이하 ‘타밀 타이거’) 전사자들을, ‘나라’란 타밀 엘람, 즉 타밀 독립국을 각각 뜻한다. 자프나 반도는 타밀족들이 홈랜드라고 부르는, 타밀 민족주의의 본고장이다. 타밀 타이거는 한때 이 반도 일부와 동부지역 일대 1만5,000㎢의 영토를 통치한 적이 있다. 앞서 언급한 기념비 행사는 ‘마비라르 날(Maveerar Naal)’로 명명된 ‘순교자의 날’(11월 27일)을 맞아 타밀 타이거 전사들을 추모하는 주간에 들어간 이 지역에서 들불처럼 번진 추모 물결의 한 사례다.
순교자의 날은 1982년 타밀 타이거의 첫 전사자인 상카르 중령이 사망한 날이 기원이다. 2009년 반군의 패배로 끝난 스리랑카 내전 종식 이후엔 제대로 추모행사가 거행되지 못했다. 그런데 올해 순교자의 날은 달랐다. 규모 면에서나, 대범함 측면에서나 최근 8년 동안과는 다른 풍경을 보인 것이다. 최후 전장이나 마지막 학살 장소, 스리랑카 정부가 불도저로 밀어버린 반군 묘지 30여곳, 대학가 등 추모 공간이 될 법한 모든 곳에 타밀족이 모여들었다. ‘반군 유니폼을 보이지 말라’는 당국의 지침은 무시됐고, 타밀 반군 최고지도자였던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의 사진도 큼지막하게 내걸렸다. 특히 반군 출신 인사들이 추모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사실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전쟁 패배 후 포로가 됐던 그들은 온갖 고문과 성폭력을 당한 뒤에야 풀려났다. 여전히 감시대상인 데다, 체포 및 납치 사례도 드물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큰 용기를 낸 것인지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타밀족 가정에는 거의 예외 없이 전쟁 중 사망한 가족이나 친지가 있다. 그럼에도 지난 8년 동안 타밀족 대학살의 정점을 찍었던 종전선포일(5월 18일)에든, 순교자의 날(11월 27일)에든 추모는 숨죽여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국의 탄압을 감수해야만 했다. 2013년 북부 마나르 지방에서 5ㆍ18 추모를 준비하던 타밀 정치인 등 15명이 체포된 게 단적인 예다. 당시 정부는 “프라바카란을 추모하려 했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2009년 5월 최후전선에서 가족과 함께 정부군에 의해 몰살당한 프라바카란, 그가 이끌었던 타밀 타이거는 스리랑카에서 입에 담지 말아야 할 금기에 가깝다.
하지만 타밀족에게 프라바카란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 인물이다. 2005년 필자가 찾은 그의 생가에는 존경의 뜻을 담은 감성적 글귀들이 벽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당시 주민들은 타밀 독립국이 현실화하면 그 곳을 타밀 역사 기념공간으로 멋지게 꾸밀 것이라고 했었다. 그가 경쟁자 처단과정에서 보인 잔인함, 내전 막판 타밀 타이거의 무차별 징병 등에도 불구하고 타밀족 상당수는 아직까지도 그가 민족을 위해 희생했다고 여긴다.
정부 상처 치유ㆍ화해 간과한 사이
타밀족 저항 동력 서서히 재부상
그러나 내전 종식 이후, 타밀족의 추모 행사는 철저한 정부 통제를 받아 왔다. 이런 사정은 2015년 1월 대선에서 ‘전후 화해 모색’을 내건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 현 대통령 집권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해 5월 16일, 최후 전장이었던 물라이티부 지구의 행정법원은 “(5ㆍ18) 타밀 타이거 추모행사를 금지한다”고 판단했다. 물라이티부는 민간인(타밀족) 2명당 군인(싱할라족) 1명 꼴로 배치가 된, ‘전후 군사점령’이 심각한 곳이다. 화해와 치유는커녕, 학살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피해 지역으로 가해자들을 보낸 셈이다.
올해 5ㆍ18도 마찬가지였다. 물라이티부 내에서도 최종 학살지인 어촌 물리바이깔에선 희생자를 형상화한 동상 주변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긴 돌들을 모아놓으려 했다. 그러나 이를 준비하던 엘릴 자렌드람 신부는 ‘국가안보 위협’이란 이유로 경찰서와 법원에 수시로 불려 다녔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최근 들어 조금씩 변하고 있다. 물리바이깔은 어느새 타밀 저항과 타밀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고유명사가 됐고, 11ㆍ27 순교자의 날 행사도 치러졌다. 심지어 일부 지역에선 주류 싱할라족의 용맹을 상징하는 스리랑카 국기가 내려지거나, 게양을 거부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전후 상처 치유와 화해 노력이 간과되는 사이, 타밀족 저항의 동력이었던 타밀 민족주의가 서서히, 그러나 눈에 띄게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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