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이수지 지음
비룡소 발행ㆍ40쪽ㆍ1만5,000원
곡절 끝에 수능이 끝났다. 지난 두어 주 난리라도 치른 듯하다. 올해엔 실제 난리가 났으니 더 그럴 만하나, 아이들의 열두 해가 오직 대입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양 해마다 소란스레 몰아가고 몰려가는 분위기는 씁쓸하기만 하다. 소란의 끄트머리에 그림책 한 권 집어 든다.
스케이트를 신은 소녀가 빙판에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표지를 넘기면, 면지 위에 종이 한 장 펼쳐져 있고, 곱게 깎은 연필과 지우개 놓여 있다. 다음 장에 소녀가 다시 등장하자 흰 종이는 번듯한 아이스링크가 된다. 사뿐히 지쳐 나아가니, 궤적은 선이 되어 그림을 남긴다. 빙판을 달리는 소녀, 백지를 달리는 선. 오랫동안 기량을 닦은 듯 소녀가 그리는 그림은 날렵하고 매끄럽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나선이 높고 낮은 음자리표로 변하더니, 지그재그로 리듬을 자아내다가 돌연 곧게 나아간다. 팽그르르 제자리를 돌다가, 어느새 동심원을 빠져 나와 숨을 고르며 힘을 모은다. 이윽고 때가 되었다는 듯 뛰어오르는 소녀, 솟구쳐 오르는 선! 공중에서 네 바퀴 반을 돌고 빙판 위로 내려앉는데, 아뿔싸! 중심을 잃어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그림 한 장 멋지게 그려내고 싶었던 열망이 깨진 탓일까. 소녀는 그리던 그림을 마구 구겨 버렸다. 구겨진 열망의 언저리에 흩어진 지우개가루와 닳은 연필이 쓸쓸하다. 거기까지인가?
‘아니!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책장을 넘기니 구겨 뭉쳤던 그림이 다시 펴져 있다. 소녀가 구김자국 남아 있는 빙판을 돌아보는데, 소년 하나 엉덩방아를 찧으며 미끄러져 들어온다. 아니, 하나가 아니다. 둘, 셋, 넷, 다섯... 소년과 소녀들이 넘어져서도 웃고 있다. 순간, 시간이 훌쩍 거슬러 올라간다. 유년시절의 노천 얼음판, 거기 작은 소녀와 소년들이 재잘대며 놀고 있다. 잘 타건 못 타건 그저 얼음을 지치는 것이 즐거웠던 아이들. 투박한 빙판 위에서 아이들은 얼마나 많이 넘어졌던가. 그러나 얼마나 많이 엉덩이를 털며 다시 일어났던가. 일어나 친구를 일으켜 세워 주고 어린 아우 손잡아 끌어 주며, 얼마나 신나게 깔깔댔던가. 친구의 허리를 붙잡고 다 함께 달려가던 기차놀이는 또 얼마나 즐거웠던가. ‘그래, 그 시간들이 나를 이만큼 자라게 했지.’ 그랬으니 소녀는 링크에 올라 제 나름의 그림을 그려 볼 수 있었을 게다. 결정적 순간에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넘어짐으로써 그 시간들을 기억해 냈다면 실수는 실패가 아니다.
비로소 마지막 장을 넘긴다. 뒷면지 위에 여러 장 그림이 포개져 있다. 어느새 연필은 짧아져 있고 지우개도 반쯤 닳았는데, 맨 윗장에 그려진 숲속의 얼음판이 소담하다. 소녀가 다시 일어나 그려 낸 것일까? 곧 성년이 될 소녀는 그 순수의 얼음판을, 예전처럼 그저 깔깔거리며 친구들과 더불어 달리고 싶은 걸까? 그리 되길 바라며 책장을 덮는다.
다시 스산한 현실, 내 아이를 비롯한 많은 아이들이 빙판에 넘어져 의기소침해 있다. 그리던 그림을 구겨 내던진 아이들도 있을 터. 하지만 넘어진 김에 잠시 누워 숨을 고르고, 구겨버린 그림을 다시 펼쳐 찬찬히 들여다보길 권한다. 하여, 링크 위의 경연은 삶의 일부일 뿐이며 인생에는 고난도 점프보다 더 가치 있는 것들이 많다는 진실을 발견해 준다면 고맙기 그지없겠다.
어른으로서 아이들 사는 세상 조금도 낫게 해 주지 못한 주제에, 넘어진 아이들에게 꼰대스런 당부만 늘어놓고 맺으려니 미안하다. 하물며, 넘어져 볼 기회조차 빼앗긴 세월호와 구의역과 제주 어느 공장의 아이들에게야 면목 없는 심정 어찌 말로 다하랴.
김장성 그림책 작가ㆍ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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